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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함께/여기저기 땡땡책모임

노동운동 독서회를 소개합니다

혼자 울컥하길 잘하는 사람들, 모여서 울컥하다

 -황세원(늦깎이 대학원생)

 


7~8년 전, 아마 20대 말쯤이었던 것 같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Beloved)를 다 읽고 나서 이해가 안 돼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작가의 대표작이라면 응당 인류의 보편적인 정서와 공감대를 바탕으로 씌었을 터이니, 그 때의 내가 느낀 것은 실망감이라기보다는 소외감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공감되지 않았던 것은 1800년대 후반 미국 남부 배경의 이 소설에서 흑인 여성 노예인 주인공이 왜 백인 농장주로부터 목숨을 걸고 탈출할 결심을 했는지, 그리고 그 농장주가 잡으러 왔을 때 왜 딸아이를 죽이면서까지 저항했는지, 그 계기에 대한 것이었다.

소설 후반부에 배치됐을 그 설명을 기다리면서, 채찍질과 강간, 교수형 등의 만행이 즐비한 전반부로 볼 때 틀림없이 유혈이 낭자하고 극단적으로 생명과 인간성이 유린되는, 특히 여성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잔혹한 사건이었으리라고 예상하며 읽어나갔었다.

그러나 드디어 밝혀진 그 주된 이유는, (스포일러가 돼서 안타깝긴 하지만) ‘학교 선생이기도 했던 백인 농장주가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여주인공을 동물과 동일 선상에 놓고 특징을 분석하는 수업을 했다는 것이었다. 여주인공은 자식들에게 그런 일을 당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일념으로 탈출을 감행했으며, 극단적인 선택까지 했던 것이다.

 

석연치 않게 책장을 덮었던 기억은, 건망증이 심한 나인데도 때때로 되살아났다. 그리고, 2012년 이후로는 더 자주 떠올랐고, 때때로 내 삶에 개입해 오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너는 나와 다르다’, ‘너는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대접을 받았을 때에 가지게 되는 분노, 노예로 태어났건 가난하건 무식쟁이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그 감정에 대한 공감대가 서서히 생겨난 것이다.

물론, 300년 전 흑인 노예와 나를 동일시한다는 게 자연스럽지는 않다. 그보다는 (피난민 자손이라 족보가 분명치 않으니) 소작농이거나 노비였을지도 모를 나의 어느 조상이, 흙바닥에 엎드린 채 대청마루 위에 앉은 주인(혹은 지주)에게 개돼지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참아보려 했으나 총기가 남다른 아들의 눈에 끼어가는 분노를 보고 더 이상 참아선 안 되겠다고 떨쳐 일어났던 어떤 사람이었을지 모른다는 편이 그나마 가깝게 여겨진다. 그리고 아마도 그 결과로 가족이 몰살을 당하고 몇 명만 겨우 살아 북쪽으로 달아났을(우리 할머니 고향은 함경북도 회령)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 일을 후회하지 않았을 거라고, 자식 보기에 부끄럽지 않았을 거라고, 혼자 소설을 쓰곤 했다. 6개월 동안.

 

이런 생뚱맞은 생각을 집중적으로 했던 이유는, 다니던 신문사가 2011년 말 파업을 했고, 그 직전까지 만 10년을 다니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노동자의 처지를 파업 6개월 동안 뼈저리게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사장은 우리 노조원들이 뿌린 전단을 자식들이 보고 울었다는 이유로, ‘절대 타협 불가를 선언했으며 기자 선배이기도 한 임원들은 애들이 울었다더라는 말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면서 우리를 비인간적인 무리로 몰았다. 파업 직전 해고된 노조위원장 선배에게도 두 아이가 있다는 것, 이대로 가면 더 많은 해직자와 해직자 자녀가 생길 것이라는 점은 그들의 안중에 없었다. 장기 해직자의 가족은 내색을 안 하더라도 늘 불안해하고, 아이들의 꿈마저도 조금씩 쪼그라들게 된다는 것은 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장과 노조원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사장의 자식과 노조원의 자식은 똑같지 않았다. 이에 대한 반발이 강경파를 만들었다. 온건파와 비파업 선배들은 확대 해석을 경계했지만, 그것은 확대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분노가 가슴을 꿰뚫고 지나가는 어떤 순간을 경험했는가 아닌가의 문제였다.

 

그런 치열함이 존재했음에도 6개월의 파업은 성과 없이 끝났고, 역시나 해직자들이 생겨났고, ‘무릎 꿇고 납작 엎드리면 받아 준다는 것과 다름없는 엄포 속에 나는 그 회사를 떠났다.

 

그리고 옮겨간 다른 조직과 그 업계에서 그런 극단적인 상황을 겪지는 않았지만 노동자의 한계는 여전히 느껴졌다. ‘사회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조직에서 노동자 권리를 주장하면 사회적 가치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 조직을 해코지하려는 사람이 돼버리는 현상도 목격했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성과를 맛본 적 없는 노동 운동을 지나간 흐름으로 치부하거나,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생각과 임금 노동자는 조직에 해 끼칠 생각만 한다는 생각을 동시에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게 봤다.

 

그러던 중에 만난 것이 땡땡책협동조합의 노동운동 책읽기 기획독서회였다. (지금까지 무지무지하게 긴 사설이었다.)

 

노예의 삶을 거부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기 위해 싸워온 노동자들의 이야기들에 관심 있는 분들, 노동자로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함께 고민을 나누고 싶은 분들, 회사 생활 때문에 화병 나 죽을 거 같은데 이야기 나눌 사람이 없는 분들. 이런 분들 대 환영입니다.”

 

2014214, 페이스북 땡땡책 그룹에 이용석 조합원이 노동운동에 관련된 책을 읽는 모임을 시작하려고 합니다라면서 올린 글이다.

 

이 글을 읽었을 때는 땡땡책 조합원도 아니었고, 당시 직장에서 만들고 있던 뉴스레터에 소개할 목적으로만 이 협동조합에 관심을 가졌었다. 그럼에도 이 글은 유독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 조합원이 기획독서회 참가자를 낚기’(?) 위해 살짝 풀어놓은 자기 고백에도 마음이 움직었다.

 

짧은 노동조합 활동을 되돌아보면서, 문득 나 말고,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은 어땠을까,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 사람들도 우리처럼 회사를 망하게 하려는 과격분자 취급을 받고, 연못을 흐리는 미꾸라지 취급을 받고, 노동자 의식도 없고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애들이 철없이 설친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는지 궁금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혹했던 대목은 화병 나 죽을 것 같은데 이야기 나눌 사람이 없는 분들이라는 것이었다. 비슷한 경험을 나누고, 같이 울컥하고,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자리라. 다름 아니라 나의 노동에 대해서, ‘노동조합 활동에 대해서 그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가입을 하건 안 하건 일단 한 번은 가보고 싶어졌었다.

 

220, OO책 아지트에서의 첫 모임에는 아홉 명이 자리했다. 대부분 출판업계에서 일하거나 일한 경험이 있었고 노조를 만들었거나, 함께 했거나, 혹은 노조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스스로가 노동자임을 깨닫게 됐는지, 어찌하여 노동조합과 내 삶이 겹치게 됐는지, 그래서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목말라 했던 사람들이었다. 이 독서회에 참여하고 싶어서 땡땡책협동조합에 가입한 사람들(모임이 끝날 무렵 가입한 나를 포함해서)도 있었다.

 

따져 보면 이 독서회는 책읽기보다는 이야기에 방점이 찍힌 편이다. 처음 개설 의도는 그렇지 않았는지 몰라도, 모임 때마다 수다가 끝없이 이어지고 특히 지난 얘기를 하다 울컥하는 순간들이 자주 찾아온다는 걸 보면 부인할 수가 없는 사실이다.

 

함께 읽은 책은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창비)를 시작으로 , 여성노동자’(그린비)를 거쳐 노동자 쓰러지다’(오월의봄)까지 이어졌다.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읽으면서는 1970~1980년대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 운동을 이끌었던 이유가 나날의 노동현장에서 경험하는 실존적 현실, 비인간적 대우에 있었으며 이 여성들이 외쳤던 주된 구호는 인간적으로 대우해 달라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정부가 기업을 살찌우기 위해 노동자에게 돌아가야 할 임금 및 복지를 가로채고, 이 도시 노동자들을 유지하기 위해 농민들에게서 쌀을 저가로 강탈한 결과가 지금의 불균형하고 불안한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점도 깨달았다.

 

, 여성노동자는 노동과 노동운동의 현장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전체와 연결 지어 보게 해 줬고, 나의 노동 현장과 가족, 삶의 연결 지점들을 돌아보게 했다.

 

노동자, 쓰러지다술술 읽히는 흡입력으로 참가자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고, 출판사 대표님과의 만남에 이어 저자와의 만남까지 기획하게 만든 책이었다. 다만, 즐거운 흡입력은 아니었다. 자본에게 짐승은커녕 생명체의 대접조차도 받지 못 한 채로 숱하게 쓰러지고 죽어가는 노동자들의 생생한 이야기는 분노의 바람을 또 한바탕 일으켰던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자면 촘촘하게 열리는 모임, 높은 출석률, 놀라운 독서 속도가 갖춰진 독서회일 것으로 생각하는 이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다.

핑계를 대자면 일하고 공부하고 연대하고, 가족들과 함께 하면서 다들 치열하게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고, 좀 솔직하게 말하자면 가벼운 책읽기가 아니라서 부담이 적지 않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마도, 이 독서회는 가늘더라도 꽤 길게 이어질 것 같다. 참 드물고, 그래서 소중한 우리의 노동이야기가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고 보면 상처 잘 받고 소심한 사람들, 혼자서 울컥하길 잘 사람들, 그래서 함께 울컥해 주는 사람이 얼마나 고마운지 아는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