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흐르는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강광석 외 39명 지음, 박지홍 이연희 엮음, 봄날의책, 2013)
-이용석
도나스, 대추리, 이종범, 소, 쑥국, 아버지, 우편배달부, 송경동, 할머니, 2루수, 밀양…… <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를 읽고 나서 나를 떠나지 않는 단어들이다. 도무지 공통점이라곤 발견할 수 없는 단어 조합이, 사람들 사는 모습이 저마다 고유한 무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다.
산문집이라, 글이 어렵거나 이해가 안 되는 건 없었지만, 한달음에 읽어내려 갈 수는 없었다. 한 편 한 편 읽을 때마다, 내 기억을 더듬고 내 감정을 추스릴 시간이 필요했다. 임중혁의 도나스 이야기를 읽고 나선 못 참고 도나스를 사다 먹고, 서효인의 이종범 이야기를 읽고 나선 내 어린 시절 우상 이종범의 기록들을 찾아봤다. 노순택의 정태춘 이야기를 읽고 나선 자연스럽게 내 상상은 황새울 너른 들판을 떠올리고 되었다. 어린 시절 이야기, 고향과 부모님 이야기에서부터 지금 사는 이야기들, 노동과 투쟁까지 다양한 삶의 단편들이 담겨있다. 굳이 거칠게 나누어 보자면, 지나간 것들을 추억하는 이야기들은 아련했고, 현재 살아가는 모습을 풀어낸 이야기들은 대체로 서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시절 이야기에는 고향집과 둘레 풍경과 부모님이 오롯이 살아있지만, 지금 이야기들에선 고향에서 쫓겨나고, 회사에서 쫓겨나는 게 우리들 사는 모습이지 않나.
산문의 힘이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누구를 설득하거나 가르치려는 글이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주는 글들. 글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이야기’인 글들. 허세나 자기만족, 위선과 과장이 끼어들 필요가 없는 글들. 글 쓴 사람들의 삶에서 내 삶과 맞닿은 부분들을 음미하게 된다. 사람마다 이 책을 읽을 때, 가슴에 와 닿는 글들이 다를 것이다.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았을 테니까.
이 책을 평하는 건 이 정도로 하면 좋을 거 같다. 내가 다른 사람이 살아온, 살고 있는 삶에 대해 구구절절 평가할 수는 업지 않은가. 그렇지만 서평을 이리 끝내면, 땡글땡글 편집하는 양똘이 글을 빠꾸시킬 거 같아서, 나도 내 이야기를 조금 덧붙이려고 한다. 사실 <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를 읽으면 어느 누구라도, 평소엔 쓰지 않은 읽기 한 줄을 쓰거나, 멀리 있는 친구에게 손편지로 이런저런 내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 거다.
우리 아버지는 전라도 나주 출신이다. 덕분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해태타이거즈 팬이었고, 사춘기를 광주에서 보내기도 했다. 광주에선 조선일보를 보는 집이 거의 없고, 김대중이라는 이름 뒤에는 선생님이 꼭 따라다녔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97년 대통령 선거 개표방송 때다. 우리는 다른 친척들과 함께 이모네 집에 모여서 개표방송을 봤다. 외갓집은 목포였으니 그야말로 모두가 김대중 대통령을 기대하고 고대하였다. 나는 개표 방송을 보다가 밤이 깊어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어른들이 한꺼번에 “와!”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개표 시작한 뒤 내내 뒤지고 있던 김대중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역전한 것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이모와 이모부, 삼촌과 숙모 모두 한마음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학생운동을 하면서는 아버지와 나는 사이가 내내 안 좋았다. 나는 맑스주의 계열 학생운동 그룹에 속해서 활동을 했는데, 우리에겐 김대중은 노동자를 착취하는 국가 기구의 수반이었다. 더구나 아이엠에프에 굴복해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도입한 장본인이 아니었던가! 나는 김대중 대통령을 욕하고 아버지는 그걸 못마땅해하셨다. 나는 차츰 아버지와 정치 이야기를 피했는데, 아버지는 술을 한잔 하시면 꼭 나와 정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난 아버지와 대화하는 법을 몰랐고, 사실은 나와 정치적인 의견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법을 모르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는 한참 이야기 끝에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래, 넌 대학까지 가서 공부 많이 하는데, 내가 널 어떻게 말로 이기겠냐.”
갑자기 가슴 한쪽을 커다란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공부를 꽤 잘해서 나주에서 광주로 중학교를 다녔는데, 돈을 벌지 않는 할아버지 때문에 할머니가 고생하는 걸 볼 수 없다며 공업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일찍부터 돈을 벌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한테 이겨 먹어서 뭐하겠다고, 내가 몹쓸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나는 사회당 김영규 후보를 지지하며 선거운동을 했다. 한달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선거 운동을 했다.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 직전에 학생회 선거 때문에 한 달을 집을 나와있었는데, 한 달 만에 집에 들어가서 또 한 달 동안 집에 못 들어온다고 말하는 아들에게 잘 다녀오라는 말만 하셨다. 대통령 선거 운동이 끝나고 투표하는 날 새벽에 집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깊게 잠이 들었고, 어머니가 나를 맞이해주셨다. 어머니는 투표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아버지와 함께 동네 호프집에 가셨는데, 아버지가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옆 테이블 사람들에게 말을 거셨다고 한다. 대통령 선거 전날이니 당연히 선거 이야기가 나오고, 어머니는 괜한 시비가 일 수도 있으니 정치이야기 하지 마라고 말리셨지만 아버지는 말을 듣지 않으셨다. 그런데 아버지가 옆 테이블 사람들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하셨다고 한다.
“우리 아들이 사회당 선거 운동하고 있으니 내일 선거에서 사회당 후보 찍으쇼. 정 찍기 싫으면 노무현 찍고.”
다음 날 아버지가 누구를 찍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를 보면서 눈물이 나는 걸 억지로 참느라 혼이 났다.
요새는 나는 아버지와 정치 이야기를 종종 한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우리 집은 화기애애했다. 모두가 대통령을 욕하니 싸울 일이 없었다. 나는 그게 대통령 이명박 덕분이라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다. 우리 아버지 덕분이다. 이제 우리 아버지는 선거에서 절대로 민주당을 찍지 않는다. 저번 총선에서는 진보정당을 찍으셨다.
나는 단 한 번도 우리 아버지한테 어디 찍으시라고 말한 적이 없다. 아버지는 늘 스스로 판단을 하셨던 거다. 대학 시절 나는 아버지를 무지몽매한 김대중 추종자로 몰아붙였지만, 아버지는 그 시절에도 스스로 판단하셨을 거다.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나는 우리 아버지보다 더 무지몽매했다. 아버지는 늘 당신 삶을 바탕으로 판단을 하셨던 것일 텐데, 대학시절 나는 내 삶은 고민하지 않은 채 머리로만 이해한 세상을 진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 말이다.
'조합원 연재마당 > 땡땡 서평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평모임-3월의 주제 '한국소설'] 김애란, 《침이 고인다》 (0) | 2015.04.12 |
---|---|
<국가 없는 사회> 서평 by 유해정 (0) | 2014.11.13 |
우리, 노동자로 살아가다(땡땡책, 2014) (0) | 2014.10.09 |
일베의 사상(오월의봄, 2013) (0) | 2014.10.09 |
밀양을 살다(오월의봄, 2014) (0) | 2014.10.09 |
삼평리에 평화를(한티재, 2014) (0) | 2014.09.21 |
우리는 군대를 거부한다(포도밭, 2014) (0) | 2014.09.21 |
이 폐허를 응시하라(펜타그램, 2012) (0) | 2014.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