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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 연재마당/땡땡 서평단

[서평모임-5월]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미선)

 

 

미선




 

자음과모음 사옥 앞에서 열린 집회에 참여한 후 집에 돌아와 책을 펼쳤다모임 전까지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이 한편으로 있었지만한가롭게 앉아 있다가 책장에서 이 책(무려 브레히트 시집)을 스윽빼들어 읽게 되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도 한편 들었다.

 

조금은 격앙되어 있었고그런 만큼 눈에 잘 들어오겠거니 했는데막상 그렇지는 않았다한두 대목은 들어봤을 법한 익숙한 시들도 눈에 들어오지를 않고겉도는 느낌이다애초에 시집을 하룻밤에 읽는다고 했던 것 자체가 무리였을지 모르겠다.

 

그러다 벽에다 못을 박지 말자는 시구가 모래알 씹듯 걸리적거렸다.

 

1.

벽에다 못을 박지 말자.

저고리는 의자 위에 걸쳐 놓자.

무엇 때문에 나흘씩이나 머무를 준비를 하느냐?

너는 내일이면 돌아갈 것이다.

 

(중략)

 

서까래에서 석회가 떨어지듯

(그것을 막으려고 하지 마라!)

정의에 거역하여

국경에 설치해 놓은

폭력의 울타리는 썩어 무너질 것이다.

 

2.

네가 벽에 박아 놓은 저 못을 보아라.

언제쯤 너는 돌아갈 것 같으냐?

네가 마음속 깊이 믿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너는 알고 있지 않느냐?

 

날이면 날마다

너는 해방을 위하여 일하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글을 쓰고 있다.

네가 너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너는 알고 있지 않느냐?

마당 한 귀퉁이에 있는 저 밤나무를 보아라.

물이 가득 담긴 주전자를 너는 이제 그리로 무겁게 나르고 있구나!

 

― 브레히트망명 기간에 관한 단상(살아남은 자의 슬픔김광규 옮김한마당, 1985)

 

나치에 쫓겨 오랫동안 망명 생활을 지속하던 브레히트는 벽에다 못을 박지 말라며 자신을 채근한다망명에 안주하며 살게 될 수도 있다는 마음이 못을 박는 행위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나치를 향해탐욕스러운 사람들을 향해 아랑곳없이 비난을 퍼부었던 이의 내면에는 이렇듯 자신을 향한 채근도 못지않게 강했던 것이다고백하자면 나는 나에게도 관대한 만큼 남에게도 쓴소리를 못한다. 남에게 쓴소리를 하려면 자신은 더 열심히 살아야 하고 성찰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네가 벽에 박아 놓은 저 못을 보아라. / 언제쯤 너는 돌아갈 것 같으냐?” 브레히트에게 은 결국 자신을 안주하게 하는 걸림돌이다못을 깊이 박아 놓고그 방에 머물 수밖에 없는 여지를 만들어 두고서는 방을 떠날 수 없다브레히트에게는 못을 박는 행위였던 것이나에게는 무엇일까늘상 뒤로 물러설 여지를 남기는 것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과보호하는 것무작정 버티고 또 버티는 것……내 방에는 못이 무수히 많다.

 

악에 받친 듯비장미 넘치는 이 시인의 글들은 못 하나 박는 것조차 스스로 용납하지 않는 이였기에 가능할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고허세로라도 그렇게 살고 싶다 말하기도 꺼림칙하지만벽 깊숙이 못을 박고 싶을 때마다 이 시구가 계속해서 걸리적거릴 것은 분명하다.


우리에게 보다 바람직한 일은 차라리 사납게 덤벼드는 것이다.

아주 조그만 기쁨이라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고통을 주는 자들을 힘차게 막아서 무찌르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 세계를 우리의 집처럼 만드는 것이다!


― 브레히트「세상의 친절」과 대립되는 노래(살아남은 자의 슬픔김광규 옮김한마당, 1985)


너무나 명쾌한 그의 시구가 가끔은 꺼려지기도 했는데, 그 명쾌함이 오늘은 조금은 다르게 다가오는 듯하다. 그의 방에는 '못'이 없어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