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친구출판사의 새 책/문학

절대돌아올 수 없는 것들/파시클



가격 11,000원/조합가 9,900원


내가 읽은 책 한 권으로 인해 온몸이 오싹해졌는데 그런 나를 어떤 불로도 따뜻이 못한다면,

그게 시예요. 마치 정수리부터 한 꺼풀 벗기듯 몸으로 느껴진다면, 그게 시예요.

오직 이런 식으로만 나는 시를 알아요. 다른 방법 있나요?

- 에밀리 디킨슨, 토마스 웬트워스 히긴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100여 년 전 페미니스트 뮤즈로부터 당신에게

미국 여성 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의 시선집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이 출간되었다. 책은 8장으로 구성되어 총 56편의 제목 없는시들을 담고 있다. 시인이 생전에 손제본 형태로 직접 만들곤 했던 시집을 일컫는 이름인 파시클’, 이 책을 낸 출판사의 이름이기도 하다.

에밀리 디킨슨은 현재 독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미국 시인 가운데 한 명이자, 후배 시인과 비평가는 물론 예술가들에게도 큰 영감을 주는 페미니스트 뮤즈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디킨슨의 시가 처음부터 전 세계 독자들이 애송하는 시였던 것은 아니다.

에밀리 디킨슨은 1830년 미국 매사추세츠의 작고 조용한 도시 애머스트에서 태어나, 188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무려 1,800여 편의 시를 썼지만 생전에 발표했던 시는 지역 신문에 실린 7편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디킨슨이 자신의 시를 대중에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다. 디킨슨은 친밀한 사람들에게 편지 형태로 시를 보내곤 했다. 그리고 40여 편씩 시를 묶어 직접 필사하고 편집하여 파시클이라는 시집을 만들어두었다. 그 파시클 44권이 시인이 죽은 후 발견되었고, 4년이 지나 첫 시선집이 크게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뒤로도 계속해서 시선집이 출간되어 세상에 전해졌다.

 

출판은 경매예요

이렇듯 에밀리 디킨슨이 생전에 시를 집필하고 세상으로 내보낸 특유의 방식, 그리고 작은 도시 안에서만 살며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았고 공적 저술이나 사회·정치 참여 활동 흔적이 없다. 시인 스스로 여성주의 문학관을 공언한 적은 없으나 독자들이 시를 읽다보면 여성주의 시라고 손쉽게 정의할지 모른다. 틀린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쉬운 판단으로 시인의 실제 시들에서 그러한 특성이 어떻게 구현되는지 예리하게 읽어내는 재미를 놓치지 않으면 좋겠다. 시인이 시에서 여성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면, 이때 여성의 목소리란 대체 무엇인지, 또한 여성의 삶 속에서, 동시에 그 삶의 울타리를 훌쩍 벗어나 그 목소리가 어디까지 가 닿는지, 이 책의 시들은 잘 보여주고 있다.

영문학 전공의 편역자 박혜란은 에밀리 디킨슨이 1,800여 편의 시에서 기존 문학 전통과 관례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독창적 표현을 실험했으며, “주변의 일상과 자연 속에서, 혹은 독서를 통해 발견하고 사유했던 여러 주제들, 예를 들면 사랑, 죽음, 상실, 영원함, 아름다움 그리고 글쓰기와 읽기의 즐거움을 노래했다고 설명한다. 주목할 점은 그러한 보편적인 주제를 노래할 때에도 당시 청교도의 엄숙함이나 가부장적 질서, 물질주의 생활양식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리듬과 형식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 지적대로 에밀리 디킨슨의 시들은 아무리 무거운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읽기에 무겁지만은 않다. 점잔을 떨거나 자기 불만을 헛기침으로 에둘러 전달한다거나 정색하고 일침을 놓는 것은 전혀 디킨슨의 방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장난꾸러기 요정 또는 세상사에 통달한 여신이 약간의 미소를 머금고 이 얘기 저 얘기를 쏟아내는 느낌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엄숙함, 가부장 질서, 물질주의의 허를 찌르는 것이 가능해진다.

 

출판은경매예요 / 인간의 정신을 사고팔지요/ 가난으로그런 추잡한 일을 / 정당화하겠죠

(출판은경매예요부분)

 

그가 시키는 대로 그녀는 일어났다평생 / 갖고 놀던 놀잇감들을 팽개치고 / 명예로운 일을 맡으려고 / 여자라는, 아내라는

(그가 시키는 대로 그녀는 일어났다평생부분)

 

나 죽을 때파리 한 마리 붕붕대는 소리 들렸는데/ 방 안은 고요 / 몰아치는 폭풍 사이/ 공중의 고요 같았다// (중략) // 나는 내 유품을 유언하고서명을 마쳤다 / 나의 어떤 부분을 / 지정할 수 있을까그런데 그때 / 거기 끼어든 파리 한 마리// (후략)

(나 죽을 때파리 한 마리 붕붕대는 소리 들렸는데—」 부분)

 

경계로부터 자유로운 수많은 들의 향연

역자는 에밀리 디킨슨 실제 시의 서술상 전반적인 특징 중 하나로 ‘1인칭 화자를 꼽는다. 바로 라는 인물이 등장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이 자기 감정과 생각을 직접 토로하는, 우리에게 익숙한 스타일의 서정시로 국한하기는 어렵다. 디킨슨의 시에서 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어디로든 옮겨가며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단지 옛날 소도시에서 별다른 바깥 활동 없이 평생을 살았던 어떤 여자의 목소리라고 전제한 채 읽어나가다가는 놀라움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어느 시에서는 별안간 이 화자로 등장한다.

 

내 평생 세워둔장전된 총이었는데/ 구석에 처박혀 있던어느 날 / 주인이 지나다알아보고는/ 날 챙겨 나갔다// (중략) // 그리고 밤이면근사했던 우리의 하루를 마치고/ 나는 나의 주인의 머리를 경호한다/ 함께하기에는 오리 솜털 / 푹신한 베개보다그게 더 낫다// (중략) // 비록 그보다 내가더 오래 살 수 있더라도 / 그가 더 오래 살아야 한다나보다/ 나는 죽일 힘만 있고/ 죽을 힘은없으니까

(내 평생 세워둔 장전된 총이었는데 —」 부분)

 

이 독특한 체험을 제공하는(독자 자신이 먼지 쌓여 있다가 드디어 쓰이게 된 이 된 것처럼 느껴지는) 시에 대해 역자는 파괴의 힘을 지녔지만 주인/주체가 없다면 아무런 능력도 발휘 못하는 상상력일 수도 있고, 힘과 능력은 있으나 자유 없이 복종하며 주인을 지키는 존재인 노예의 상황일 수도있다고 해설한다.

이 시 외에도 디킨슨이 일종의 빙의를 통해 재현하는 는 주로 대상으로 인식되던 어떤 존재인 경우가 잦다. 소녀 때 어른들에 의해 옷장 안에 갇혔듯이, 이제 산문 속에 갇힌 자((그들은 나를 산문 속에 가두었지), 다들 진리를 위해 죽을 때 드물게도 아름다움을 위해 죽은 자(나 아름다움을 위해 죽었으나 드문 일), 심지어는 아무것도 아닌 자[nobody](난 아무도 아냐! 넌 누구니?) 등이 자신을 주어로 말할 때, 자신이 지니고 있는 폭발력과 수동성의 역설을 말하는 언어의 힘에 주목해 읽는다면 한층 긴장감 넘치는 읽기가 될 것이다.

 

파시클의 첫 책, 디킨슨의 파시클

파시클 출판사에서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계속 번역하여 소개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작년에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 7편과 그 시들에 대한 신혜원 작가의 그림을 엮은 그림 시집’ 4권을 스페셜 에디션으로 먼저 펴낸 바 있다. 파시클의 첫 책이 디킨슨이 생전에 자기 시를 세상과 나누던 고유의 방식을 따른 파시클시집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앞으로 이 출판사가 어떠한 마음으로 독자에게 책을 전하고 나눌지에 대한 포부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 첫 출발인 이 시집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것들에 실린 시들은 주로 역자가 특히 좋아하는 시들이라고 한다. “에밀리 디킨슨을 읽는 즐거움에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하길 바라며 시들을 고르고 옮겼다.

사실 디킨슨의 시에는 전부 제목이 없으며, 그만큼 독자가 읽고 해석하는 바에 따라 다양하고 깊이 있게 읽힐 수 있다. 시집은 그 점을 충분히 존중하고자 원문의 맛을 살리고 원문(영어)도 번역문 바로 옆쪽에 함께 싣는 배려를 했다. 그러면서도 옛날 시라는 편견에 갇히지 않도록, 앞서 말한 디킨슨의 엄숙함에 대한 거부혹은 발랄한 비틀기등을 잘 드러내는 어투를 사용했다. 장별 구성 역시 임의적인 것으로, 반드시 지켜서 읽을 필요는 없으나 역자가 대략 정리한 기준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1<멜로디의 섬광>은 시의 의미와 능력에 대한 시들, 2<어떤 비스듬 빛 하나>혼자있는 것의 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시들, 3<바람의 술꾼>은 자연에 도취하고 아름다움과 활력이 넘치는 즐거운 시들, 4<장전된 총>은 기성 사회가 배제해 왔으나 큰 힘과 능력을 숨기고 있는 존재들과 그 의미를 읽을 수 있는 시들, 5<풀밭 속 가느다란 녀석>은 새, , 석양, 강아지, 파리 등 주변에서 발견되는 아주 작은 자연의 백성들에 관한 시들, 6<가능 속에 살아>는 상상력 또는 언어의 능력에 관한 시들, 7<“희망이란 깃털 달린 놈>은 디킨슨이 후기에 특히 많이 쓴 지혜의 말, 잠언의 격언들을 담은 시들, 8<절대 돌아올 수 없는 것들>사랑의 상실로 인한 슬픔과 아픔에 관한 시들을 모았다.

 

 

저자 소개

 

지은이 에밀리 디킨슨 Emily Elizabeth Dickinson (1830-1886)

미국 매사추세츠 애머스트에서 태어나 평생 살며 1800편의 시를 남겼다. 자신의 시를 직접 출판하거나 세상에 거의 공개하지 않았지만, 소수의 친구와 가족, 지인들에게 보여주기를 좋아했다. 40여 편씩 시를 직접 필사하고 편집한 손제본 형태의 파시클fascicle 40권에 보관 했고, 더러는 편지봉투를 뜯어 그 안에 적어두기도 했다. 주변의 일상과 자연을 시에 담아 사랑, 죽음, 상실, 영원함, 아름다움, 글쓰기와 읽기의 즐거움을 노래한 시인은 당시 청교도 의 엄숙함이나 가부장적 질서, 물질주의 생활양식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리듬과 형식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사유했다. 현재 독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미국 시인 가운데 한 명이며, 많은 후배 시인들과 비평가는 물론 음악가와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는 페미니스트 뮤즈이기도 하다.

 

 

엮은이·옮긴이 박혜란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연세대와 서울대(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옮긴 책으로는 흑설공주 이야기, 황금요정 이야기, 플롯 찾아 읽기, 젠더와 민족등이 있다.

 


'친구출판사의 새 책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굿바이,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0) 2019.10.10
일러바치는 심장  (0) 2019.07.31
마냥, 슬슬  (0) 2019.07.08
사계  (0) 2019.06.20
진매퍼/에디토리얼  (1) 2019.01.23
이상의소설/스피리투스  (0) 2019.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