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마다 광장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의 불순함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도 6개월이 다 되어 갑니다. 다가갈 수 없는 거친 수면으로, 그 어딘가로, 희생자들을 넋 놓고 보내는 동안 계절이 두 번 바뀌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발생 당시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총체적인 국가 재난 시스템의 부재, 유가족들의 뜻을 끝까지 관철시키겠다던 대통령의 거듭되는 입장 번복과 회피, 한 차례 이 사회를 휩쓸고 갔던 교황의 방문, 진짜로 앉은 자리에서 죽어버릴 것 같았던 유가족들, 절정으로 치달았던 광기집단들의 행동 등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시간들 속에서 자주 참담함을 느껴야만 했던 것은 저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내 자식이 죽어도 이렇게 광장에 나와 음식을 먹을 거라던 이의 당당함에서는 부끄러움이나 공감능력의 결여만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거나 치부해버릴 수 없는 극단적인 기형의 불의를, 책임이 사라진 사회의 방조된 폭력을 느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월호 참사는 더 이상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애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징마저 불편해 하는 사람들, 특히 말로써 표현되는 것이 부적당한 것처럼 소외시켜버리는 잔재한 모든 것들. 그렇게 세월호 참사가 피상적인 일상 속에 파묻히고 세탁되는 것에 동참했던 것은 저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싸움은 늘 연대의 몫이라고 다짐하건만 제 생활은 부동했고 감정은 나약했습니다.
그렇게 다시 이 싸움이 외로워지고 있을 때, 매주 토요일마다 광장에서 모이는 이들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같은 요일, 같은 시간마다 자발적으로 모이고 만나 무언가를 한다는 <행동하는 기억 416>. 그동안엔 광장에 나온 사람들과 종이배를 함께 접으며 이야기를 나누어 왔는데, 앞으로는 책을 가지고 모인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보태는 매개로 기꺼이 책을 택한 사람들. 이 참담한 재난의 기억을 영속시키고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하는지, 그 사람들의 신중한 불순함이 궁금했었습니다. 그렇게, 책이라는 것 때문에 비로소 용기를 냈던 초라한 시작이었습니다. 어설프게 골라 든 책을 들고 가는 길에서도 그곳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스스로의 역할이 의문스러웠던 게 사실이었지만 <행동하는 기억 416>은 누군가를 중심으로 하는 특별한 주체도 없었으며 때마다 참여하는 사람들도 바뀌는, 오직 하나의 분명한 수단을 통해 역동하는 자리였고 시간이었습니다.
이 행동을 기획하게 된 이원재 씨는 “세월호 문제 자체의 해결도 중요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가 어떻게 각성할 것인지, 성찰할 것인지, 또 대안적인 삶을 모색할 것인지”를 더 중요하게 고민했었고, 그리하여 “자기 실천을 통해 세월호 사태에 접근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잊지 않겠다"라는 약속을 매일 접하면서, 사실 "잊지 않겠다"는 것의 핵심은 ‘망각’이라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새로운(깊은) 성찰과 실천’이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행동하는 기억’이라는 컨셉을 생각했어요. 그리고 전문 예술가의 퍼포먼스가 아니라 자신의 직접 행위를 통해 세월호 문제와 접속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매주 토요일 4시 16분에 자율적인 예술행동을 기획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행동하는 기억’은 세월호 참사 문제의 해결을 위한 과정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세월호 참사’로 상징되는 우리들의 삶, 한국의 사회구조에 대한 전환점을 만들기 위한 활동이 되기를 바랍니다. ‘행동하는 기억’이라는 예술행동의 방법론은 ‘내적(깊은) 성찰을 통한 급진적 실천’의 기반과 연대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원재)
또 이 행동의 시작에 함께했던 기획자 랑희 씨는 사건이 잊혀지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지치지 않고 그러면서 꾸준히 기억하고 행동할 수 있는 기회들이 오히려 많아져야 할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깊은 슬픔과 분노에 희생자들과 그의 가족들과 고통을 나누고 위로하기 위해 마음으로 모으고 그들 곁에 있으려 했지요. 근데 두 달이 지나면서 희생자 가족들은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일에 잊혀지는 게 아닐까 두려워지기 시작했고 광장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의 숫자도 눈에 띄게 줄어갔습니다. 실종자가 존재하고 진실은 밝혀진 것이 없고 책임지는 사람도 없는데, 우리는 4월 16일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한다고 했는데 권력의 힘은 변화의 노력을 자꾸 폄하하고 오히려 고립시키려 했지요. 사람들이 지치지 않고, 그러면서 꾸준히 기억하고 행동할 수 있는 기회들이 오히려 많아져야 할 것 같았어요. 광장으로 모이는 집회만이 아니라 다양하게 참여하고 지속적으로 마음에 품을 수 있는. 평상시에는 일상생활을 하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다시 기억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시간 같은 거요. 참사의 진실을 밝히고 다른 세상을 만드는 노력은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 예상되니 천천히라도 오래갈 수 있는 행동들이 지속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랑희)
그렇게 처음 나가게 되었을 때, 광장은 아직 고요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남겨 놓은 이야기로 애도의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교차하는 광장은 책을 읽기에도, 책을 읽는 것을 보여주고 공유하는 형태에도 아주 적합한 공간이었음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책을 읽을 때에는 광장 안팎으로 각자의 장소를 골라 앉고 미리 준비해 온 책의 몇몇 구절들을 소리 내어 읽습니다. 어떨 때는 둥글게 모여앉아 가까이서 읽기도 합니다. 그리고 왜 이 책을 고르게 되었는지 그 이유도 함께 나눕니다. 한 문단 두 문단, 읽고 싶은 만큼 읽고 어떤 책이든 가리지 않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의 시간만큼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들, 그리고 남아 있는 모두를 생각하며 광장에서 읽을 책을 준비하는 시간에 몰두하는 일이 기쁘고, 다시 그 일을 기록하는 일이 값지게 느껴집니다. 그날 읽은 문장들을 되새기며 사람들의 다양한 얼굴들을 보는 것이 또 온전한 행운으로 남습니다.
분명, 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거짓말에 속진 않지만, 책의 쓰임이 존재하고 책이기에 가능한 것이 여전하다는 진부함은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시간들의 광장에서 기꺼이 조응되는 형태를 볼 때, 광장에 내가 있고 광장에 있던 나와 사람들을 다시 볼 때, 계속 지나왔고 앞으로도 계속 될 그 시간들이 하나의 동질됨으로 결부되어 있음을 확인합니다. 잊지 않고 계속되는 새로움으로 맞서겠다는 의지와 다짐. 그리고 불순하게도, 같은 자리에 모여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의 풍경에서 땡땡책협동조합의 행동 독서회를 재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행동하는 바가 곧 뚜렷한 메시지인 이 불순한 책읽기에, 조합원 여러분들도 언제고 함께해주시길 고대하며 기다리겠습니다. <행동하는 기억 416>은 매주 토요일 오후 4시 16분, 시청 광장에서 시작합니다.
[제안서] '행동하는 기억, 4.16' 프로젝트 (랑희)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했고 304명의 생명은 이제 우리 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비통한 사건으로 우리는 절망스럽고 원망스러우며, 부정하고 싶은 우리의 현실을 보았습니다. 이 현실은 이미 우리 곁에 있었지만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던 무엇으로 인해 보이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이 비통한 사건을 겪고 나서야 가려진 일부가 벗겨지고 우리사회의 민낯의 일부를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으로 좀 더 날카로워진 눈을 갖게 되었고 그 눈으로 가려진 꺼풀을 더 벗겨내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과 고통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죽음과 고통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죽음과 고통에 대해 눈을 질끈 감는다 해도 이미 우리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과 고통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안고 살아갈 때 새로운 삶의 희망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이 세월호 참사에 대해 우리가 기억하고 말해야하는 이유입니다. 이윤보다 인간이라는 외침도, 정부가 책임져야한다는 주장도, 사건에 대한 의혹도, 안전한 사회를 위한 의견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참사 두 달이 지난 지금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12명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팽목항을 떠나지 못하고 있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이 사건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유가족들이 나서서 '세월호 특별법'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라'하고 세월호에 대해 말하는 것을 '정치적'이라 비난하고 광장의 분향소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습니다.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은 과거를 잊으라는 것이며 죽음을 죽음으로만 머물게 합니다. 우리의 정치는 함께 살아가기 위한, 인간존중과 생명의 공동체를 위한 정치입니다. '삶과 생명'을 위한 정치를 비난하는 것은 소수의 권력을 위한 정치적 왜곡이며 과거와 같이 '그대로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정치적 공세와 경찰을 동원한 봉쇄에도 우리는 기억하는 행동, 표현하는 행동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기억하는 그 곳에서 죽음을 삶이 되고 다른 사회로 한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하고 애도하고 표현하기 위해 모입니다.
이 참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우리는 기억하고 애도하고 있습니다. 궁금한 것은 의문을 품을 수 있고 변화를 요구할 수 있으며, 비판하고 반대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향한 꿈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함께 모이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론의 장으로, 광장으로 나올 때 바램과 표현은 살아 움직이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