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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종이배를 접는 시간"



종이배를 접는 시간 

197일. 그 시간을 돌아 딸은 자신의 열여덟 번째 생일날 부모 곁으로 돌아왔다. 197일 만의 일이었다. 바로 그 전날은 세월호 선체 인양에 대한 투표가 이뤄진 날이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 딸이 맞다,는 확신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하지만 끝내 그 이름이 맞았다. 수면의 바깥에서 간절히 기다려 왔던 춥고 깊은 자리 너머의 딸. 사진 속 케이크의 촛불이 노랗게 타오르고 있었고, 모두가 그녀를 애도했다. 친구들은 잊지 않겠다고, 돌아와 줘서 고맙다고 마음을 써 보냈다. 하나뿐이던 딸을 잃은 부모는 힘겹게 말을 빻았다. '미리 하늘나라에 가서 편하게 있으면 나중에 아빠가 만날 수 있게… 부디 하늘나라에서 편하게 있어.' 197일 만에 입밖으로 내보았던 목소리, 절절한 육성이었음이 분명했을 그것. 그 말을 올리기까지 성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 텐데 자식에게 편하게 있으라고 한다. 슬픈 시간이다. 

어떨 때는, 잊어버릴 수는 없어도 살아가던 대로 살아가는 일엔 스스로도 큰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나도 회사에선 일만 하며 시간을 죄다 보내버리고 그 값으로 돈을 번다. 속보는 텍스트로 처리되었다가, 귀가 후 닥쳐오는 감정으로 한꺼번에 다스려진다. 바다 끝자리에서 평생의 기다림으로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 도무지 일상에서 멀어지지 않고 분리되지 않는 오롯한 비극. 그 고통의 무게를 하루도 저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도 나는 여전히 앞선 감정과 뒤처진 감정 사이를 반복하고 있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광장도 몇 번은 못 나갔다. 

다분히 그 자리만으로 위안을 삼거나 무언가를 대신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나갈 때마다 그 자리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들은 이미 그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실 종이배를 접는 게 별일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거기 앉아서 책을 읽든 말든 대개의 사람들은 큰 관심도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지난 주, 광장에서의 시간은 있을수록 좋았고 즐거웠다. 지난 주에는 아이들이 먼저 배를 접고 싶다고 작은 돗자리 안으로 먼저 발길을 멈추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엄마 손을 이끌고 동생과 함께 형이나 언니와 함께, 아니면 저 혼자라도 자리를 잡고 앉아서 배를 접고 싶어 했다. 그런 아이들을 보고 또 다른 아이들이 멈춰 섰다. 준비된 종이가 다 떨어질 정도로 많은 아이들과 학생들, 가족들, 사람들이 함께했고 직접 배를 접지 못하면 만들어진 노란 종이배 겉면에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고 이름을 썼다. 아이들은 나처럼 겉멋 든 한마디를 대충 적고 가려 하지 않았다. 펜 색을 하나하나 다르게 맞춰가며 의미를 담아 진실하게 그렸다. 왜 배를 접는지 아느냐고 물어 보면, 끄덕끄덕 하고 대답한다. 왜 이런 그림을 그렸냐고 하면 솔직하고 분명하게 알려준다. 그리고 아이들이 오랜 시간 동안 배를 접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쓸 때까지 옆에서 차분히 기다려 주는 가족들이 있었다. 종이배를 접는 시간은, 할 수 있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이 분류되지 않는 거리의 뒤섞인 움직임이고, 다시 기억으로 남는 과정이다. 



사실 나는 이날 읽으려고 들고 갔던 책을 다른 책, 다른 문장으로 바꿔 읽었다. 현장에서 시를 쓰든 쓰지 않든 변화된 주체의 이행을 통해 이미 충분히 새롭다고 하던 마지막 문장에 동의할 수 없게 되어서였다. 그리고 그날 서점에서 산 황정은 작가의 이야기를 소리 내어 읽었다. 


세월호가 가라앉고 백 일이 되는 날, 안산에서 서울광장까지 꼬박 하루를 걸어온 유가족을 대표해 한 어머니가 자식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했다. 그녀는 말했다. 엄마아빠는 이제 울고만 있지는 않을 거고, 싸울 거야. 나는 그것을 듣고 비로소 내 절망을 돌아볼 수 있었다. 얼마나 쉽게 그렇게 했는가.

유가족들의 일상, 매일 습격해오는 고통을 품고 되새겨야 하는 결심, 단식, 행진, 그 비통한 싸움에 비해 세상이 이미 망해버렸다고 말하는 것, 무언가를 믿는 것이 이제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다 같이 망하고 있으므로 질문해도 소용없다고 내가 생각해버린 그 세상에 대고, 유가족들이 있는 힘을 다해 질문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공간, 세월이라는 장소에 모인 사람들을, 말하자면 내가 이미 믿음을 거둬버린 세계의 어느 구석을 믿어보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내가 뭘 할까. 응답해야 하지 않을까. 세계와 꼭 같은 정도로 내가 망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응답해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의 처음에 신뢰를 잃었다고 나는 썼으나 이제 그 문장 역시 수정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제 11월 1일이면 200일이다. 그날도 누군가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종이배를 접을 것이다. 그날이 되면 사람들이 다시 무언가를 기억하러 와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