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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출판사의 새 책/인문사회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괜찮아!

정가 16,500원

 

새로운 분배의 상상력에서 찾은 AI 시대의 해법

 

‘개같이 일만 하라’고 강요하는 사회는 이제 그만!!!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은 오래된 편견일 뿐.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는 세상,

극도로 불평등한 이 ‘헬조선’을 언제까지 견뎌내야만 할까?

 

모두를 위한 소득 VS 모두를 위한 상속

 

모든 시민의 총소득을 늘리는 사회적 배당금인 ‘기본소득Basic Income’이든

지금 당장 실행 가능한 사회적 상속인 ‘기초자본Basic Capital’이든

고용 없는 저성장 시대에는 노동의 굴레를 벗어난 ‘모두를 위한 분배’가 답이다!

“모두를 위한 소득은 ‘지속 가능한 소비력’이 여러분에게 실질적으로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힘을 줄 거라고 말합니다. 반면 모두를 위한 상속은 누구나 스스로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기회가 실질적인 자유를 행사할 수 있게 만들 거라고 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지속 가능한 소비력’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기회’를 원하십니까? 물론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이 두 가지가 모두 가능한 세상입니다. 저는 머잖아 그런 세상이 분명 오리라고 믿습니다.” - 본문 중에서

 

◆ ‘모두를 위한 소득’과 ‘모두를 위한 상속’이라는 21세기 분배제안

전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심각한 나라, 한쪽에서는 최저임금 1만 원을 놓고 여야와 노사가 치열하게 싸우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똘똘한 집 한 채’라는 돌풍 아래 ‘어디는 하루아침에 몇 억 올랐다더라’ 하는 소문이 다수를 극심한 박탈감과 좌절감에 빠뜨리는 나라, 한 번 실패하면 재기가 거의 불가능한 나라, 극소수의 자리를 놓고 모두가 미친 듯이 경쟁에 목매는 나라, 세계 11위의 GDP를 자랑하면서 실업자는 113만 명도 넘고 비정규직 노동자는 870만 명에 달하며 결식 우려 아동이 무려 33만 명이나 되는 나라. 우리의 현실은 미래 세대들이 마음껏 자신의 장래를 꿈꾸기에는 너무 어둡기만 하다.

전체 구성원의 절대다수가 행복과는 거리가 먼 이런 현실에서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건 나쁜 일이 아니야”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정치철학자가 있다. 이미 1990년대 말부터 기본소득과 기초자본이라는 새로운 분배 개념을 접한 저자 김만권은 당시만 해도 그런 이야기를 꺼내면 곧바로 ‘미친놈’ 취급을 받았다고 회상한다. “일도 안 하고 소득을 받아가다니 그게 말이 돼? 사회가 상속을 해주면 그게 공산주의지! 제발 꿈 깨고 현실에서 철학 좀 해라.” 그런데 이제 수많은 사람이 기본소득을 요구하고 사회적 상속이 법안으로 제안되는 것을 보며 뭔가 평행우주 같은 곳에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저자의 고백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겪은 ‘상전벽해’의 한 단면일 것이다.

이후 2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정치철학을 가르치며 밥벌이를 하고 있는 김만권은 대학에서 늘 마주하는 어린 제자들의 고통과 절망에 함께 아파하고 눈물 흘리면서 하루빨리 ‘헬조선’에서 벗어날 해법을 강구했다. 그러다 “낡은 서랍 속 반가운 편지처럼 기본소득과 기초자본이라는 발상을 꺼내 들고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무료 강연을 열어 젊은이들과 소통하면서 이 두 분배제안이야말로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 조금 더 인간적인 사회를 짓기 위해 정말 필요한 시스템이라는 확신을 굳히게 되었다.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괜찮아 - 21세기 분배의 상상력』은 그런 열망과 소통의 산물이다.

 

◆ 새로운 분배의 상상력은 노동 밖에서 시작된다!

20세기 중반까지 산업사회 시대의 중심에는 ‘노동’이 있었고 ‘일하는 사람’이 우대받을 수밖에 없었다. 노동력이야말로 사회의 생산성을 높이는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모름지기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면 번듯한 직장에서 얼마나 많은 연봉을 받으며 일하느냐가 관건이었다(안타깝게도 그런 분위기는 지금도 여전하다). 그러나 탈산업 소비사회로 들어선 지금, 세상의 중심은 노동자가 아니라 ‘소비자’가 되었다. 더불어 점차 많은 분야의 일거리를 사람이 아닌 로봇들이 대체해가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다른 어느 국가보다 그 대체속도가 매우 빠른 게 현실이다.

알파고와 이세돌 기사가 벌인 세기의 대결에서 이세돌은 겨우 한 판 신승을 거두었고, 그 결과에 거의 모두가 놀라움(과 두려움)을 금치 못하던 게 엊그제 일이다. 말 그대로 ‘AI 시대’가 눈앞으로 바짝 다가와 있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는 ‘빅 이벤트’였다.

세상은 이토록 무서운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데 ‘노동’을 대하는 우리의 감각은 여전히 20세기 에 머물러 있다. 2016년 세계경제포럼에서 “세계 일곱 살 아이들의 65%는 지금 없는 직업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발표가 나왔지만, “한국 학생들은 미래에 필요하지 않은 지식과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 하루에 15시간씩 공부하고 있다”는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지적에서 우리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과연 우리 사회에 밝은 미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미래 세대의 절망은 결국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절박하게 일하고 싶어도, 목숨 걸고 입사시험 준비를 해도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한 현실에서 언제까지 “열심히 공부해야 돼! 좋은 대학 들어가 좋은 직장 구해야 사람대접 받는 거야”라고 아이들을 내몰 것인가! 아이들은 이미 현실을 꿰뚫고 있다. 건물주 아니면 연예인이나 크리에이터가 장래희망 1순위 아닌가. 전통적인 의미의 노동은 이미 설자리를 잃은 지 오래다.

여기 이런 ‘노동하는 자만이 혜택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전통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난 분배’가 있다. 이 새로운 분배는 말한다.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괜찮아! 넌 이 땅의 시민이잖아? 그 이유만으로도 넌 충분히 분배받을 자격이 있어!” 바로 ‘기본소득’과 ‘기초자본’이다.

 

◆ 기본소득: 모든 시민의 총소득을 늘리는 사회적 배당금

기본소득은 서울시와 성남시에서 ‘청년배당’의 형식으로 실험 중인 덕에 이제는 상당히 익숙한 발상으로 자리 잡았다. 다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 두 정책은 기본소득이라고 부르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조건 없이, 현금으로”라는 원칙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핀란드는 2,000명에게 매월 560유로(약 74만 원)를 지급하는 실험을 하고 있고,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서는 핀란드보다 그 규모가 두 배에 달하는 4,000명에게 1인당 연 1만 6,989캐나다달러(약 1,410만 원), 부부의 경우 2만 4,027캐나다달러(1,995만 원)를 3년 동안 지급하는 실험을 올해부터 시작했다. 이란은 2010년부터 매해 모든 국민에게 1만 6,400달러 정도 지급하고 있으며, 이 외에도 아이슬란드,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브라질, 인도, 나미비아 등에서 국가나 지자체가 중심이 되어 기본소득을 실험하고 있거나 그 실험을 논의하고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알래스카영구기금으로 보통 해마다 1,000달러에서 1,300달러가량(적을 때는 800달러, 많을 때는 2,000달러)이 개인에게 지급되고 있다.

한편 기본소득의 기원은 16세기 인물인 토머스 모어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비베스, 콩도르세, 푸리에, 밀, 러셀 등을 거쳐 콜과 미드, 토빈과 페츠먼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기를 거쳐 꾸준히 설파되어왔다. 이미 빌 게이츠를 위시한 세계적 자본가들이 적극 지지하기 시작한 기본소득은 “각 개인에게 아무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현금을 지급함으로써 개인의 총소득을 늘려 지속 가능한 소비력을 주는 것”이 핵심이다. 지급대상이 부자인지 빈자인지, 일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 사회에 기여할 만한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등은 전혀 따지지 않는다. 그냥 이 사회의 구성원이면 누구나 다 받을 수 있는 ‘소득’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녹색당이 기본소득을 정책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다만 그 막대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느냐가 관건이며 “사회적 합의와 정치적 의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과제가 있다.

 

◆ 기초자본: 모든 구성원을 위한 사회적 상속

‘자본급여, 기초자본급여’로도 불리는 기초자본은 “국가가 성년에 이른 시민들에게 일정 정도의 자본을 목돈의 형태로 제공하는 제도”를 말한다. 기본소득과 달리 한 번에 목돈을 지급함으로써 인생 출발선상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지분’ 이론에 기대고 있다. 18세기 인물인 토머스 페인이 ‘국가기금’이라는 형태로 처음 이 발상을 제시했으며, 이후 샌드퍼드와 앳킨슨의 ‘부의 자본세’, 르 그랜드의 ‘유권자 급여’, 켈리와 리사워의 ‘베이비 본드’를 거쳐 애커먼과 알스톳의 ‘사회적 지분급여’ 모델로 면면이 이어져오고 있다. 가장 최근의 이론이자 가장 널리 알려진 제안인 ‘사회적 지분급여’ 모델을 제안한 애커먼과 알스톳은 1999년 당시 “성인기를 시작하는 21세에 1인당 8만 달러씩 나눠주자”고 주장했다. 이후 2017년까지 미국 경제 규모가 두 배 이상 성장했으니 산술적으로만 보자면 지금은 15만 달러(약 1억 7,000만 원)도 줄 수 있다는 얘기다. 자신의 인생을 시작할 청년 세대에게 이 정도의 목돈을 사회가 상속해준다면 오늘날 같은 극단적인 불평등을 획기적으로 완화할 수 있을 것이며,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모든 구성원의 안정감과 행복도 또한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올해 3월에 ‘청년사회상속법’이라는 이름으로 관련 법안을 발의한 상태이며, “20세에 이른 모든 청년에게 1,000만 원의 기초자산을 주자!”는 것이 핵심이다. 2017년에 거둬들인 상속·증여세가 5조 4,000억 원인데, 이 정도 재원만 있어도 지금 당장 실행 가능하다는 점이 기본소득 정책에 비해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힌다. 물론 넘어야 할 산은 많다.

 

◆ 기본소득이냐 기초자본이냐, 우리의 선택은?

기본소득과 기초자본은 둘 다 ‘모두를 위한 분배’의 발상으로서 ‘조건 없이 현금을 지급한다’는 공통점이 있는 반면, 크게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다.

_ 기본소득은 모든 사람에게 소비에 필요한 돈을 정기적으로 쪼개어 주자고 하는 반면, 기초 자본은 모든 사람이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목돈을 주자고 말한다.

_ 기본소득은 시민 모두의 단기적인 소비력을 해결해주는 게 실질적 자유의 첫걸음이라고 하 는 반면, 기초자본은 인생의 출발점에 선 청년들이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기회를 한 차례 라도 주는 게 더 낫다고 말한다.

_ 이런 비전의 차이 때문에 기본소득은 상당한 규모의 재원이 필요한 반면, 기초자본은 초기 비용이 훨씬 덜 든다.

기본소득과 기초자본 둘 다 시행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막대한 재원문제를 생각하면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모두를 위한 소득’ 대 ‘모두를 위한 상속’ 논쟁이 실제로 치열하게 진행되어왔다. 예컨대 대표적인 기본소득주의자인 필리페 반 파레이스와 사회적 지분이론가인 애커먼과 알스톳은 2003년 ‘리얼 유토피아 프로젝트’ 회의에서 서로 격렬한 논쟁을 벌인 바 있다. 국가가 두 제안 모두를 동시에 받아들이고 시행할 수 없다면 일단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제안이 더 정당하며 효과적인가’라는, 단순하게 보이지만 복잡하고 어려운 질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여러분이라면 어느 쪽에 손을 들겠는가?

저자는 단언한다. 누군가 ‘배부른 소리 하네!’라고 힐난할 수도 있지만 ‘다 같이 배부르기 위해’ 하는 제안이라고. 그러면서 제임스 미드가 실업과 빈곤문제 해법으로 제시한 ‘아가소토피아Agathotopia’라는 용어를 소개한다. “비록 유토피아는 아니지만 최소한의 자산이 공동체의 시민들에게 평등하게 분배되어 사실상의 완전고용을 가능하게 만드는 좋은 사회.”

이런 사회가 정녕 실현 불가능한 ‘꿈’으로만 여겨진다면 우리는 ‘헬조선’이라는 암울한 현실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오랜 세월 우리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완고한 고정관념에 균열을 내고 불평등과 분배에 대한 각자의 해법을 열심히 나누면서 실현 가능한 정책으로 다듬어나가다 보면, 미래 세대는 더욱 행복하게 자랄 것이며 기성세대는 ‘아가소토피아’에서 여생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작은 낡은 이데올로기와 편견에서 벗어나 21세기에 걸맞은 분배의 상상력을 꽃피우는 것이며, 21세기 분배를 현실화하는 힘은 ‘이 제안들을 함께 지지할 수 있는 평범한 우리 안의 연대’에서 나온다.

 

◆ 지은이 | 김만권

김만권은 철학자다. 땅에 발 딛고 선 철학을 하고파서 정치철학을 한다. 그러고 보니 생각으로 현실에 세상을 짓는 게 직업이다. 한편으로 김만권은 30개월 아이를 둔 아빠이기도 하다. 너무 늦은 나이에 본 아이라 그럴까? 이 아이가 안심하고 살 세상을 어떻게 지을 수 있을까 이런저런 고민이 많다. 승자들이 모든 것을 가져가는 세상에서 그 모든 것을 가져가는 아이로 키워야 하나?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이렇다. 100분의 1도 안 되는 승자가 되는 확률에 걸기보다는 이 아이가 평범하게 자라도, 아니 조금은 모자라게 커도 걱정 없이 맘껏 사랑하고 존중받고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게 훨씬 현명한 길이라는 것. 이 아이에게 가장 안전하고 좋은 세상은 세상의 모든 아이가 똑같이 안전하고 좋다고 느끼는 세상이라는 것. 그래서 아빠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도 좋은 세상을 짓고 싶다.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 책이 그리고 있는 ‘모두를 위한 소득’, ‘모두를 위한 상속’은 그런 세상을 짓기 위한 첫걸음이다.

그동안 『김만권의 정치에 반하다』, 『호모 저스티스』, 『정치가 떠난 자리』, 『참여의 희망』, 『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 『그림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불평등의 패러독스』, 『자유주의에 관한 짧은 에세이들』을 썼다. 이에 더하여 『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 『인민』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차례

프롤로그: 모두를 위한 분배는 가능한가

 

Part 1 노동 밖으로 나간 분배라고

왜 노동이 분배의 중요한 수단인가 | 소비사회에서 노동윤리란?

풍요의 시대와 함께하는 불평등의 시대 | 노동으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왜 노동 ‘밖’ 분배인가? | ‘권리’로 분배하는 ‘조건 없는’ ‘실질적’ 소득

 

Part 2 왜 우리는 그저 열심히 일해야만 할까?

‘노동’의 의미 | 자본주의 사회, 왜곡된 노동 | 강요된 노동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

자동화된 세상, 축복일까? 저주일까? | 일과 생활의 균형? 그건 좋은 것일까?

게으름은 정말 나쁜 것일까? |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고?

 

Part 3 기본소득: 모든 시민의 총소득을 늘리는 사회적 배당금

세계의 갑부들, 기본소득을 지지하다 | 기본소득의 발상, 그 기원과 역사

모든 구성원에게 조건 없이 개인별로 | 부자들도 받아야 빈자에게 이롭다

재분배가 아니라 최초분배 | 여러 수준의 정치공동체에서 지급 가능하다

기본소득의 재원은 다양하며 환경도 보호할 수 있다

‘정기적으로’, 상품권이 아니라 ‘현금으로’ 지급해야 한다

기본소득은 노동유인을 죽이지도, 죽일 수도 없다 | 기본소득은 ‘소득’만이 아니라 정의도 실현한다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힘의 원천 | 자본과 노동이 서로 합의할 수 있는 기본소득

 

Part 4 기초자본: 모두를 위한 사회적 상속

혹 부모에게서 물려받을 자산이 있나요? | 상속의 힘 | 부모가 아니라 사회가 상속을 한다면?

기초자본의 기원과 역사 | 인생을 출발할 종잣돈을 지급하라!

모두가 자신의 지분을 갖게 하라 | 자, 8만 달러씩 받아가라!

부유세로 1단계 재원을 마련하라 | 사회적 지분에 혜택을 입은 사람이 2단계 재원을 제공하라

실질적인 기회평등과 자유를 보장하라 |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적 정의다

노동당, 자녀신탁기금을 만들다 | 부여받은 자기 지분은 자신이 알아서 써라! | 젊은이여, 야망을 가져라

 

Part 5 모두를 위한 소득 대 모두를 위한 상속

‘21세기 분배’ 제안! 기본소득과 기초자본 | 녹색당의 ‘기본소득’ 대 정의당의 ‘기초자본’

기본소득 대 기초자본 논쟁 | 왜 기본소득인가: 기초자본에 대한 비판

왜 기초자본인가: 기본소득에 대한 비판 | 모두를 위한 소득 대 모두를 위한 상속

복지국가를 넘어 자산평등국가로 | 소수를 위한 상속을 넘어 모두를 위한 상속으로

 

에필로그: 혐오와 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한 분배를 위하여

 

◆ 본문 맛보기

자본은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모든 것과 언제든 결혼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자본’과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이익이 맞아떨어진다면 국가도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겁니다. 자본-국가-시민의 이익이 맞아떨어질 수 있는 이 새로운 21세기 분배제안, 바로 기본소득과 기초자본입니다. (11~12쪽)

사람이 일한다는 것, 노동한다는 것 자체를 거부할 이유는 없죠. 하지만 정말 하고 싶지 않은 강요된 노동이거나, 너무도 장시간의 노동이거나, 내가 들이는 수고만큼 대가가 돌아오지 않는 노동이라면, 그런 노동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누구는 하고 싶어서 하냐? 다 하기 싫은 일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묻고 싶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만족하십니까? 남들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겁니까?’ (74쪽)

기본소득은 사람들을 노동시장으로 돌려보내는 것 자체를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재분배를 받을 대상을 선별하지 않아요. 모든 사람이 최소한의 자원을 확보할 수 있도록 국가가 모든 개인에게 일차적 분배를 하는 거죠. 이런 점에서 기본소득은 본질상 최초분배라는 겁니다. 사실 많은 기본소득주의자가 오히려 복지국가에 반대합니다. 자산조사에 입각해서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를 선별해 제공하는 복지는, 국민을 주는 자와 받는 자로 분열시키고 주는 자는 박탈감을, 받는 자는 열등감을 느끼게 만든다고 보기 때문이죠. 특히 노동하지 않는 사람을 2류 시민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기본소득주의자들은 복지국가라는 발상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126~127쪽)

결론 삼아 분명히 정리하자면, 기본소득에 대한 만족이 노동할 유인을 죽인다는 건 일종의 허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허상을 현실처럼 인식하곤 합니다. 그걸 우린 ‘이데올로기’라고 부르죠. 노동하는 자만이 혜택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이데올로기가 허상을 현실처럼 믿게 만드는 겁니다. 이런 허상이 미디어의 호응을 받을 수 있는 건, 어쩌면 이 제도의 실질적 수혜자가 중산층 이상이 아닌, 미디어가 호응하고 보호해줄 필요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반대로 분노를 느끼는 층이 미디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중산층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분배가 노동 밖으로 나가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140쪽)

2016년에 피터슨연구소에서 상속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세계에서 자산 10억 달러 이상 부자 중 30%가 금수저 출신으로서 증여나 상속으로 부자가” 됐답니다. 빌 게이츠처럼 10억 달러 밑으로 물려주는 부자들이 서양에는 그래도 제법 많다는 거죠. 이 연구에 한국도 들어가 있었는데요, “한국은 상속이나 증여로 10억 달러 이상 부자가 된 비율이 74%”였답니다. 10억 달러면 얼마죠. 1조인가요? 상상이 안 가네요. 너무 액수가 높다고요? 그럼 조금 낮춰볼까요? 기업경영성과 평가사이트 CEO스코어라는 곳에서 한국・미국・중국・일본 등 4개국 상위 주식부자 160명의 2007~2017년 재산 현황을 조사했답니다. 이 중 상속형 부자가 48명이었다는데요, 한국 부자가 25명이었다는군요. 미국・중국・일본은 10명 중에 3명 정도가 상속형 부자인 데 반해 우리나라는 6명이 넘었답니다. 다른 나라보다 상속이 미치는 힘이 훨씬 더 강했다는 거예요. 조사한 160명 중에 자수성가한 부자가 112명이었다는데, 이 중에 한국 부자는 고작 15명이랍니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상속이 훨씬 더 많이 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간접적인 증거인 셈이지요. 수저론은 바로 이런 경향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는 직접적인 담론입니다. (169~170쪽)

녹색당이 주장하는 기본소득과 정의당이 내세운 기초자본은 ‘소득과 부의 이전과 확산’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본질적인 측면에서 서로 어긋나지 않습니다. ‘노동에 대한 요구가 없다’는 점에서, ‘자유를 실질적으로 활용할 기회를 주려 한다’는 점에서 이 두 제안은 사실상 같은 토대를 공유하고 있지요. / 그런데 두 제안이 제시하는 삶의 비전 자체는 상당히 다릅니다. 우선 기본소득은 모든 시민에게 꾸준히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자는 겁니다. 그래서 이 제안의 이름처럼 ‘소득’의 이전과 확산이 주요 목표인 거죠. 사실상 ‘지속 가능한 소비’가 목표인 겁니다. 반면 기초자본은 개인이 꿈꿀 수 있는 기회를 주려 합니다. 특히 기초자본주의자들은 인생 초기에 나타난 불평등이 평생을 지속하기 때문에 출발점의 불평등을 완화해야 진짜 교정효과가 나타난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들은 그 누구라도, 단 한 차례라도 실질적으로 자기 인생을 설계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 하는 거죠. 다시 말해 ‘인생설계 기회의 확산’이 목표인 겁니다. (229~230쪽)

그렇습니다. 불평등은 누군가가 가난해진 뒤 교정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최소한의 자산과 인적 자본을 보장해서 해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 대다수의 불평등이 유년기부터 시작된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를 근본적으로 교정하고자 한다면 끝이 아니라 시작, 다시 말해 나이 들어서가 아니라 어린 시절에 투자해야 한다는 겁니다. 더 많은 교육, 더 많은 자본이 더 많은 기회의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근본 원인이라면, 소수를 위한 상속을 넘어 인생의 출발점에 선 청년 모두를 위한 상속이 좀더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게 제 이론적 신념입니다. (246~2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