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합원 연재마당/내가 좋아하는 디자인 by 최진규

3편 - 글자 디자인이 만드는 책의 표정

편집자가 디자이너에게 표지 디자인을 의뢰하는 일을 흔히 표지 발주라고 해요. 책의 내용을 간추려 공유하고 출간 컨셉을 다듬어 전달하죠. 디자이너는 편집자가 전달한 발주 내용과 원고를 함께 검토하며 작업 계획을 세우고요

편집자에게 이때는 참 골치 아픈 순간이기도 해요. 이전까지의 작업에서는 자기 혼자만 책 내용이나 컨셉을 알고 있으면 되었는데, 디자인을 발주하는 단계에 이르면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디자이너에게) 책을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언어로 설명해야 하는 과제에 맞닥뜨리게 되지요. 교정을 몇 번씩 진행하며 이제 원고의 토씨까지 빠삭하게 안다고 여기다가도 막상 이 단계에 이르면 막막해질 때가 많아요.

해당 원고만의 개별성을, 핵심 컨셉을, 최고의 매력을 엑기스처럼 뽑아내는 일이 만만치 않아요. 때론 이 원고 짱!” “이 책 진짜 중요!” “읽어 보면 알아요!” 이렇게만 설명하고 다 때려치우면 좋겠다는 마음도 생기고요. 하지만 좋은 원고인 것을 넘어서, 누가 왜 읽어야 하는지를 설득하려면 이런 단계에 시달릴 수밖에 없겠죠

한편 원고를 만지다 보면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에도 빠삭해지는데, 이 단계에서는 장점을 극대화시키면서 단점은 감쪽같이 숨길 방법에 대한 고민에도 새삼 휩싸이게 됩니다. ^^; 첫 원고 기획안을 쓸 때도 그렇고, 제목을 정할 때도 이런 고민에 빠지기는 마찬가지인데, 디자인 발주할 때는 뭔가 더 심각해져요. 구체적인 실물에 훌쩍 다가가는 일이라 그런 듯도 해요.


1. 글자 디자인이 만드는 책의 표정

저는 가장 강렬했던 표지 시안에 대한 기억이 있는데요, 제가 진행하는 책은 아니고 옆자리 동료가 만들던 책이었어요. 동료의 표지 시안을 슬쩍 건너다보다가 그만 우뚝 멈춰 섰어요. 바로 과학과 메타과학이라는 책이었어요. 장회익 선생님이 20년 전에 출간한 과학과 메타과학의 개정판 작업이었죠. 아래가 바로 그 표지예요.


 

책 내용은 전혀 쉽지 않아요. 인터넷에 실린 책 소개에서 몇 마디를 옮기면 이 책에서 장회익은 물질에서 생명으로, 우주로, 다시 인간으로 이어지는 평생의 학문 여정을 현대 과학에 대한 통합적 이해로 빚어낸다는 거고요. 출간의 핵심 컨셉은 물론 ‘20주년 기념 개정판이었을 테고요

이런 다양하면서 묵직한 특징들을 어떻게 구현할까. 저는 이 정도면 벌써 머릿속이 혼란한데, 디자이너의 작업은 정말 명쾌했어요. 그리고 핵심들이 모두 표현돼 있죠. 책 제목, 제목과 거의 같은 크기로 저자명, 장회익 선생님의 인상적인 사진 한 장. 이렇게만 있는데, 단 세 가지 요소가 멋진 비례 속에 자리잡아 기념비적인 느낌도 자연스레 드러내는 듯 했어요. 

그리고 고개를 돌려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뭔가가 있었는데, 가만 생각하니 글자의 모습이었어요. ‘저게 무슨 서체지?’ 잠깐 고민했는데 곧 서체가 아니라는 걸 알았죠. 이 책만을 위한 글자 디자인, 레터링이었어요. 제 경우에는 이때 이후로 글자 디자인에 관심이 생겨났어요.

이건 제가 올초에 옥천에 처음 이사 와서 왔을 때 겪은 일인데요, 이삿짐 정리를 대강 해두고 동네 산책을 나섰어요. 어떤 가게들이 있나, 어떤 밥집들이 있나,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는 데가 어디어디일까, 궁금증을 안고 두리번거리며 길을 걸었죠. 그때 많은 가게들을 보았지만, 특히 기억에 남은 곳이 있었어요. "신기보리밥" 집과 "반월목공소"라는 곳. 원체 보리밥을 좋아하고, 또 나무 만지는 일을 로망으로 그리다 보니 밥집과 목공소가 눈에 띈 점도 있죠. 그런데 그보다 그 간판이 너무 맘에 들었어요. 간판 만드시는 분, 그리고 목공소의 경우는 목수가 손수 만든 느낌인데, 딱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간판만 봐도 가게에 대한 기대가 생기는 인상이었어요. 달리 말하면 '좋은 표정' 혹은 '기대되는 인상'인 거죠. 처음으로 앞으로 살 동네를 구경하던 날에 그런 가게들을 찾았으니 저는 기분이 너무 좋았고요.




간판에는 대개 가게 이름을 적죠. 책으로 치면 제목을 적는 거죠. 그런데 그 글자를 어떻게 적을 것인가. 서체 대신 가게의 정체성, 혹은 만드는 이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도안의 글자로 적으면 어떨까. 우리 주변의 간판들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살펴보면 그런 특별한 글자들이 많아요. 제 경험상 특히나 열쇠가게의 간판들은 대부분 그렇더라고요. 가만 보면 정말 멋진 글자 디자인이 많습니다. '열쇠'라는 글자가 그렇게 다양하게 적힐 수 있다는 게 놀랍죠. 정말 열쇠 같은 '열쇠' 글자를 보기도 했어요. 그런 손 작업, 글자를 매만진 작업들은 분명 눈길을 사로잡고 어떤 인상을 남깁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책 표지의 레터링이나 타이포그래피를 살펴볼 수 있어요. 아래에는 몇몇 표지 디자인들을 모아봤어요. 글자 디자인이 책의 컨셉을 비롯해 장르나 정체성까지 대번에 표현하는 경우가 있죠. 그리고 글자가 효과적으로 이미지가 된 경우 제목에 대한 집중력도 높아지는 듯해요. 맘에 드는 간판 앞에서 우리가 그렇듯, 독자 입장에서 두리번거리거나 망설일 이유가 적어지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