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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 연재마당/사람과 일과 건강 by 김신범

1편 “간이 깨끗한 알코올중독?”

(2013년 12월에 작성된 글입니다)


제가 일하는 연구소는 녹색병원과 함께 만들어졌습니다. 녹색병원 의사들은 제게 환자의 직업과 관련한 의논을 해올 때가 있습니다. 일반 환자와는 뭔가 다른 것을 의사가 느꼈는데, 혹시 환자의 직업이 관련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할 때입니다.

벌써 십 년이 된 일인데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환자가 있습니다. 어느 날 내과과장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사회복지사 선생님께서 알코올 중독 환자를 데려왔는데, 생각보다 간이 깨끗하다는 겁니다. 술이 아니라 다른 원인인 것 같은데, 환자가 구두를 만드는 제화노동자라고 합니다. 뭔가 원인이 있겠냐는 겁니다. 제화노동자는 본드를 많이 사용합니다. 구두에 일일이 본드칠을 해서 하나하나 붙여나갑니다. 작업장에 앉아 바로 코앞에서 본드칠을 하다보니 냄새를 많이 맡게 됩니다. 그런데, 본드에는 벤젠, 톨루엔과 같은 유기용제가 들어있어서 암도 오고 유기용제 중독도 올 수 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내과과장은 환자가 유기용제 중독인지 아닌지 알아봐야겠다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곧 환자가 산업재해였다고 알려왔습니다.

여기까진 일반적인 상담 중 한 건일 뿐입니다. 그런데, 환자의 얘기가 이랬습니다. 환자는 나이가 들면서 화를 잘 참지 못하고 성격도 나빠지게 되었답니다. 가족들과 다툼도 잦아지고 직장에서도 동료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답니다. 울적할 때면 술을 먹었고, 그러면 집에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 모양입니다. 참다못한 아내가 딸을 데리고 집을 나갔습니다. 딸도 다시는 아빠를 보지 않겠다고 작정을 했고 연락을 완전히 끊었답니다. 환자는 결국 술에 더 의지하게 되었고 집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웃들이 동사무소에 얘기해서 사회복지사가 환자를 녹색병원으로 데려오게 된 이유입니다.

술이 원인이 아니란 얘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술은 눈에 보이는 원인이었고,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습니다. 유기용제 중독에 걸린 환자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대방이 내 얘기를 못 알아들으면 답답해집니다. 그러다가 무시받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면서 화가 납니다. 한편, 술 마신 다음날처럼 머리가 아프기도 하고, 몸이 무기력해지면서 일과 생활에 의욕이 없어지고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본인도 힘들겠지만, 주변 사람들도 참 힘듭니다. 말로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요. 딱하게도 환자는 유기용제 중독으로부터 찾아온 변화가 가족과 동료와 이웃의 관계를 망가뜨리는 출발점이었습니다. 이 얘기를 환자에게 들려주었더니 눈물을 한참 흘리더군요. 인생을 포기하려 했는데 다시 일어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이 사례를 자주 떠올립니다. 노동자에게 있어서 일이란 무엇이고 생활이란 무엇일까. 딱 잘라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겁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만나는 노동자를 직장에 가두어 판단하지 않습니다. 학교를 막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막 시작한 노동자, 아이를 가지려는 예비 부모 노동자, 어느덧 노후를 걱정해야 할 나이가 된 중년의 노동자. 이렇게 노동자의 인생이 있습니다. 손가락을 잃는 사고나 아이를 갖지 못하는 불임, 겉으로는 멀쩡한데 본인은 죽겠는 근골격계질환이나 갑작스레 찾아오는 암. 이러한 문제가 이들의 인생 어느 시점에 찾아왔느냐에 따라 이후의 삶이 송두리째 변합니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과도한 업무 부담이나 스트레스와 갈등, 또는 정리해고 같은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제가 만난 어느 한순간의 노동자가 아니라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가진 노동자의 건강을 지키고 싶습니다. 변명할 수 있는 어제와, 일터의 환경을 바꿔나가야 할 오늘과 그로 인해 행복할 수 있는 내일을 지키고 싶습니다. 법에 나온 기준보다 더 소중한 건, 당사자가 얼마나 힘들어하는가 그리고 한 사람의 인생에서 이 문제가 어떤 피해를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라고 자꾸 자꾸 명심합니다.

땡땡책 조합원 여러분과 일하는 사람의 건강에 대해 얘기 나눌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조기 강판되는 일 없도록 응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