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조합원의 날에는 땡땡책의 대표 독서회인 기본소득 독서회에서 지난 1년 반동안 읽어온 책을 소개했습니다. ‘기본소득’이라는 주제로 시작했지만. 지금 현재 우리가 처한 경제-정치적 현실을 보는 눈을 키워주었던 책을 읽어왔습니다. 조합원의 날에 소개되지 않은 책도 많이 있어서 아쉽지만 최근까지 각자의 마음에 들어왔던 책소개 내용을 담아 보았습니다.
『래디컬데모크라시』 더글러스 러미스 책소개 : 기호철
처음에 <래디컬 데모크라시>. 기본소득모임인데 왜 민주주의에 대한 책을 두 번째로 읽었을까. 하승우씨가 이 책을 추천했는데, 추천하면서 경제적인 문제가 정치적인 문제일 수 있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추천해주니까. 그래서 읽었어요.
이 책 자체는 민주주의가 민중이 힘을 갖는 상태를 뜻하는데, 민주주의가 다른 말로 쓰이면서 본래 의미가 훼손되어 있다고 말해요. 그래서 민중이 힘을 갖는 상태인 진짜 민주주의는 오지 않았고, 그것을 가로막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보면서 어떻게 하면 민주주의의 상태라는 게 올 수 있을지를 이야기하는 책이에요.
저는 기본소득과 관련되어서 많이 다가왔던 것은 2장이에요. 이 책은 총 5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1장은 민주주의라고 쓰이고 있지만 그 의미들이 진짜 민주주의를 훼손한다는 내용이 있어요. 2장이 경제발전이 왜 민주주의를 가로막는지에 대한 내용이에요. 읽고 나서는 제게는 꾀나 충격적이었던 것 같아요. 경제발전, 경제라는 것의 속성안에 정치적인 것이 있다. 경제라는 게 사실 정치적인 것이다. 라는 내용이었는데요. 제가 발췌한 걸 읽으면 그 내용을 엿볼 수 있어요.
“‘경제발전’에서 ‘경제’라는 단어는 특수한 역사적 현상을 가리킨다. 그것은 사회에서 권력을 조직하고 동시에 권력의 배치를 감추는, 더 정확하게는 그것이 권력의 배치라는 것을 감추는 특수한 방식을 의미한다. 이런 애기가 놀랍다면, 숨겨진 장치들이 제 기능을 다하고 있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경제에서 최고의 가치란 생산의 효율성이라고 말한다면 딱히 놀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같은 것을 다른 방식으로 말할 뿐이다.”
“경제는 사람들의 일을 효율적으로 조직하는 방식이다. 즉 경제는 사람들이 부자연스러운 조건에서 비정상적으로 오랜 시간동안 자연스럽지 않은 일을 하게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잉여의 부에서 일부나 전부를 빼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경제발전은 경제권력과 질서, 지배의 특수한 양식을 확장시키고 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발전이 정치 영역 안에 비민주적인 지배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경제발전은 몇 가지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가로막는다. 사람들이 자유로운 상태라면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종류의, 그리고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선택한 적이 없는 종류의 노동과 노동조건, 노동량을 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가로막는다. 사회에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비민주적 구조를 만들어 두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대부분의 삶을 농장이나 공장, 사무실에서 “효율적으로” 노동하며 보내도록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잉여가치를 자본가나 경영자, 공산당 지도자나 기술 관료들이 차지하게 만들 수 있다.“
여기서 발전 이데올로기라는 게 오히려 사회주의에서 먼저 시작했다고,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레닌, 스탈린이 사회주의라는 수단을 가지고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해서 공장을 만들고, 생산의 효율성을 추구하기 위해서 어떻게 독재를 이용하는지 자세히 나와있어요.
제가 얻은 아이디어는 경제라는 것 자체가 정치적인 문제고, 어떻게 공공의 부를 나누고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거에요. 이것을 설득해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책에 있었어요.
기본소득과는 관련이 없지만 3장은 기계화가 어떻게 특정한 부류의 정치적인 선택의 결과였는지 설명해요. 그래서 왜 기계, 기술발전이라는 게 민주주의를 가로막는지에 대한 내용이 있어요. 기계, 기술발전이라는 것은 계속 진보하는 무엇 같잖아요. 사실 그 속에는 노동의 힘을 약화시키고 자본가가 잉여의 부분을 더 많이 가져갈 수 있도록 만드는 기술이 발전한 것이고. 이런 자본가의 정치적인 의지가 담겨 물화가 된 것이다라고 이야기해요.
공장식의 생산의 효율성만 추구하는 기계가 가진 역사적인 맥락들이 있는데, 기술개발을 하면서 어떻게 노동자의 힘을 빼아으려 했는지에 대한 근거가 나와요. 예를 들면 경영자 연합회에서 기계를 만들었을 때, 어떤 효과가 있었는지 주장한 바가 있는데, 자본가들이 기계를 만들 때 그것에 어떤 생각이 들어갔는지. 맥락은 거기서 들어 온 것이다.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요.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데이비드 그레이버, 그린비 2009
책소개 : 미선
“어쩌다 우리는 돈의 노예로 살게 되었는가?!!” “기본소득은 그저 허황된 유토피아적 이상일 뿐일까?”
제가 소개해 드릴 책은,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가치이론에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이라는 책입니다. 하승우 샘이 추천해주신 목록중에 있었어요. 처음에 저도 갸우뚱했어요. 이게 기본소득이랑 어떤 관련이 있을까? 우리는 상항 그런 책만 읽었어요. (모두 웃음)
이 책 같은 경우에는 인간을 어떻게 봐야하고 가치를 어떻게 봐야하고 그런 근원적인 부분을 건드려줬던 책이었어요. 이 작가는 가치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많은 부분을 할애해요. 언어학에서도 가치라는 말을 쓰고, 경제학에서도 쓰고, 그런데 이 가치라는 게 도대체 뭘까. 경제학적으로 접근하면 가치라는 것은 화폐안에 들어있는 그런 가치를 말하잖아요. 그런, 통상적으로 말하는 가치. 값어치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화폐라는 게 생겨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 가치라는 게 오래된 역사 때부터 화폐를 대신하는 가치를 교환하는 그런 매커니즘이 있었을 텐데 그런 역사를 쭉 추적해 가면서 화폐만을 숭배하고 이런 가치체계가 얼마나 문제인지를 인류학적으로 풀어가는 책이에요.
제가 생각했던 이 책의 문제의식은 어쩌다 우리가 돈의 노예로 살게 되었을까. 그 안들어 있는 수많은 함의는 보지 못하고, 돈만 보고 살게 되잖아요. 그리고 기본소득이 허황된 유토피아적 이상일 뿐일까 것일까?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이 책이 답을 줬던 것 같다.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주장하는 자본주의를 지탱하고 있는 화폐라는 교환가치. 이게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지금의 가치는 수요와 공급의 곡선으로 설명하잖아요.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주장하는 핵심은 가치라는 게 노동같은 인간의 행위로부터 생겨난다고 주장해요.이 주장을 수많은 인류학적 증거들로 뒷받침해내고 있습니다.
강수진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가치는 교환가치잖아요. 그런데 책을 통해서 교환가치는 오래되지 않았고 오래도록 증여라는 가치가 강했구나. 600페이지의 책이 반 이상이 수많은 역사를 반복적으로 이야기해요. 그래서 책 두께만큼 긴 시간이라는 느낌. 증여라는 가치가 더 오래 되었고, 단단한 존재감이 책을 통해서 확실히 와닿았어요.
김미선 이런 식으로 경제 활동한게 100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게 믿어지지가 않아.
『에콜로지카』 앙드레 고르
책소개 : 양똘
앙드레고르라는 분이 쓰셨다. 주로 한 이야기는 일자리 나누기. 노동이론가. 생태주의를 정립했다고 평가받는 사람이에요.
《에콜로지카》(2008)는 ‘정치적 생태학’이라는 주제로 고르 자신이 고른 7편의 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정치적 생태학’, 읽을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 다시 봐도 그렇고 저에게는 좀 수수께끼 같은 단어입니다. 다만 고르는 “자본주의 비판에서 출발하여 어쩔 수 없이 정치적 생태학에 이르게 됩니다”라고 말하고 있고, 이를 둘러싼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바로 ‘주체’입니다. “생태학의 도덕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은 안 하겠고, 차라리 주체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윤리적 요청에 자본주의의 이론적, 실천적 비판도 내포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결국 고르가 ‘생태학’을 말하는 것은 무엇보다 인간 주체의 해방을 위해서이고, 자본주의를 멈추고 ‘탈성장’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오지 않는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논리가 차례차례 전개된다기보다 비슷한 맥락의 글들을 모아놓은, 조금은 정신 사납게 읽히는 이 책에서 하고자 한 이야기는 뭘까요? 1장 제목처럼 ‘자본주의의 퇴조는 이미 시작되었다’는 전제로 고르는 시작합니다. 기술 발전으로 생산에 드는 노동의 양은 갈수록 줄어드는데, 노동자에 의해 생산된 가치 즉 생산성은 계속해서 증가해야만 이윤의 총량이 줄어드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생산성 경주는 더욱 심해지고, 일자리는 줄어들며 월급도 감소합니다. 결국 “생산과 생산에 대한 투자가 더 이상 상당한 수익을 내지 못하게 된다”는 내적 한계에 부딪히고, 이제는 “축적된 자본의 점점 많은 부분이 금융자본의 형태를 유지하게” 됩니다. 생산품이 아니라 돈 자체를 사고파는 ‘금융산업’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고르는 이에 대해 “세계 경제에 무겁게 드리운 붕괴의 위협은 규제가 없어서 생긴 일이 아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재생불능이라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탈성장은 살아남으려면 꼭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러나 탈성장에는 다른 경제, 다른 생활방식, 다른 문명, 다른 사회적 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그 ‘다른, 다른, 다른, 다른’ 것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일 수 있는지 제시하고자 합니다.
우리 모임에서는 그 다른 것들 중에서도 주로 ‘노동’에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기본소득이라는 제목으로 모임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많이 나눈 주제는 ‘노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부분의 고용이 ‘상근’ 형태를 기본으로 하면서 단지 ‘노동시간만큼의 일손’이 아니라 노동자의 삶이 지배받는 형태가 되어왔다는 것을 부정할 이가 있을까요? 본래 노동이 갖고 있었을 폭넓은 의미가 마치 블랙홀 같은 ‘임금(賃金)노동’ 속으로 죄다 빨려들어가버린 모양새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임금노동자는 자신의 시간과 삶에 대한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고(실제로 모임에 참여한 많은 노동자들이 이런 고통을 토로했습니다. 아니, 남 얘기 할 것도 없이 저부터도 자기고백을 하며 주책맞게 눈물을 보인 적이 있습니다), 반대로 비임금노동자는 사회에서 ‘쓸모없는’ 잉여로 취급받는 부당함을 맛봐야 합니다. 임금, 비임금 양쪽 다 불행하다면 이건 대체 누구를 위한 노동 사회일까요?
우리는 이 양쪽의 고통을 끊어내는 데에도 기본소득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임금’이 모든 노동의 출발과 끝을 결정하도록 놔두지 않고, 자본주의 사회의 화폐로 환원할 수 없고 할 필요도 없는 수많은 노동의 결을 회복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일하지 않아도 돈을 주면 누가 일을 하려고 들겠어?’라는 막무가내 식 반박론은, 우리 자신의 문제라고 가정하고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본다면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 생각은 ‘노동=돈’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이미 완전히 젖어 있는, 게다가 ‘나는 안 그럴 거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러고도 남지’라는, 형평성에 어긋난 냉소주의의 소산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아마도 ‘죽지 못해’ 일하고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임노동으로 주체성을 빼앗겨야 하기에 괴롭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노동’은 오히려 주체성 정립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좋아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모두에게 이로운 방식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한다는 것, 그것이 좋은 노동이라는 전제하에서 말입니다.
고르는 이 책에서 기본소득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고장난 채로 무섭게 달리는 이 자본주의라는 기차를 세우고 인간의 주체성을 구해내기 위해서는 현재의 노동 사회를 완전히 재구성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그와 비슷한 생각을 드러냅니다. 그 부분들을 같이 읽어보면서 얼렁뚱땅 책 소개(?)를 마칠까 합니다.
“생태사회적 정치는 주로, 노동시간과 상관없는(노동시간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노동 자체와도 상관없는 충분한 수입을 보장해주는 데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을 재분배하여 누구나 일할 수 있고 일을 좀 더 잘하면서 덜 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 노동에서 놓여난 시간을 개개인이 그들이 선택한 행동―그들의 시장 의존과 직업적 혹은 행정적 책임을 줄여주고, 직접 체험된 연대의식과 사회성의 조직, 즉 상호부조, 서비스 교환, 무정형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조직을 다시 짜게끔 해줄 재화와 용역의 자가생산을 포함한―에 쓸 수 있는 자율성의 공간을 창출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시간의 해방, 기능적으로 특화된 타율적 노동의 해방은 전체의 정치로서 구상되어야 한다.”(70쪽)
“인간능력 및 인간관계의 성숙을 좌우하는 이런 모든 자유로운 활동들, 규정되지 않은 활동들이 가능하려면 무조건적인 사회수당이 요구됩니다. 교육, 문화, 예술활동, 스포츠, 놀이, 감정적 교류 등은 ‘무엇인가에 쓰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 인간다움을 한껏 드러내게 해주고, 인간다움을 자기 존재의 의미이자 절대적 목적으로 삼게 해주는 활동들입니다. 이러한 활동들이 노동생산성 또한 증가시킨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덤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163~164쪽)
“그렇다고 해서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생계수당을 점진적으로, 평화롭게 도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안토넬라 코르사니가 이렇게 얘기했지요. ‘생계수당을 재분배 논리 안에 위치시켜서는 특히 안 되며, 자본과 노동에 바탕을 둔 부를 급진적으로 넘어서려는 전복적 논리 내에 위치시켜야 한다.’ 생계수당이라는 생각은 그 자체만으로도 단절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사물들을 다르게 바라보게 하며 특히 가치형식을 띨 수 없는 부, 즉 돈과 상품의 형식을 취하지 않는 부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줍니다.”(166~167쪽)
『소외의 사회학』 이홍균 한울 2004 인터뷰 형식을 빌림 책소개 : 강수진
소외가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잉태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듯해요. 그렇다면 이 책은 기본소득이 왜 ‘모든 사람‘이라는 주어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지금까지 소외론은 마르크스의 소외론과 동일시 되어왔고 마르크스 소외론은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의 적대적 관계만을 규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다양한 사회압력이 존재하고 있죠. 이 글은 그 사회압력의 존재를 인식의 지평 위에 올려놓기 위해서 마르크스 소외론을 사회압력으로 보완하고 그로부터 사회압력에 따른 다양한 타율적인 행동들에 대한 설명을 제공할겁니다.”
일상에서 보이지 않는 크고 작은 폭력과 소외, 배제를 경험합니다. 사회압력을 대변하는 교육을 과감히 거부한 다운이의,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죽은 지 5일이 넘은 동생과 함께 한 팔십대 할머니의, 철탑 아래 농사꾼 할매들의, 또다른 철탑 위의 노동자들의, 최저임금 알바생의 하루는 충분히 ‘살아‘지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사라지고 있는 걸까요?
이: “사회압력의 순환에 의해 소외는 순환되고 그 순환은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압력에 대한 저항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시민운동과 사회운동이 그것입니다. 사회과학적 지식이 사회구성원과 사회압력 사이를 매개하면, 사회구성원들은 사회압력의 실체를 보다 더 잘 인식하게 될 수 있고 그 인식에 따라 사회구성원의 일부에 투입되어 있는 사회압력을 사회구성원의 자아에서 축출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됩니다.”
누구는 그것이 순진한 생각이라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그동안은 사회과학이 없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거 같거든요.
이: “현대인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책임지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거나 아무도 자신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혹시 책임을 지려 하면 행위의 제약이 너무 많거나 너무 많은 부담을 져야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의 행위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압력의 사회구성원에 대한 작용은 조직된 것이지만 그 사회압력이 작용한 결과는 무책임성을 낳습니다. 조직된 무책임성입니다. 조직된 무책임성의 원인은 사회구성원들이 사회압력의 명령에 따라 행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아져야 합니다. 현대사회 시스템의 지속 불가능성,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무수한 사회문제, 해결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문제의 원인은 다름 아니라 사회압력에 따른 행위에 있습니다.”
사회압력에 따른 행위가 사회적으로 정상적인 행위로 인정되고 있는 경우 사회압력에 저항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고립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사회압력을 의식하고 있는 사회구성원이 사회압력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회구성원들의 무의식을 비난하는 일로 변질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회구성원들에게 그 비난은 무의식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인식공격이자 위신투쟁을 위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곤 합니다. 이런 경우 굉장히 당황스럽기도 한데요.
이: “사회압력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 사회압력이 자신에게 투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에게 그 비판은 사회압력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들 자신에 대한 비판이기 때문이겠죠. 그런 경우가 다반사일겁니다. 저항을 줄이는 방법은 사회기대 혹은 압력에 맞추어 어느 정도 행위 하거나 또는 그것에 저항하지 않으면서 본인은 사회압력 혹은 기대에 따라 행위 하지 않는 겁니다.”
마지막 질문은 좀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언급하셨듯이 지금까지의 사회학이 다루지 않은 사회압력이란 것을 통해 마르크스를 넘어 소외의 일반화를 시도하셨는데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면, 부적응과 고민이 시작되고 많은 것들과 부딪치게 됩니다. 그럴 때 어떠세요?
이: “만약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당연한 것이었거나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이었다면, 고민과 저항은 아무 쓸모없는 것이고 힘든 길을 가는 것은 헛고생일 뿐이죠. 숲은 보지 못하고 혹시 건강하지 못한 한 그루의 나무만을 보고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됩니다. 하지만 부딪치면서도 물러서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뚝심이나 고집으로 주장을 펴기도 해요. 어떤 확신이 있어서 그러기도 하고 혹은 나의 주장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만큼 충분히 다듬어진 것인지를 잘 구분하지 못해서 그러기도 할 겁니다.”
땡땡이들과 기본소득에서 당신을 만나게 되어서 반가웠습니다.
덧글: 흐름상 그의 글에 대한 단점은 언급하지 않았는데, 좀 과한 반복으로 인해 다음 내용의 기대치가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회학 논문 글이란 딱딱한 틀을 가진 것 치고 얇고 어렵지 않다는 미덕에 충분히 보상받는다. 무엇보다 그의 글은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또 특수한, 너만의 경험이라 치부되는 소외들을 양지로 불러내는 데 유의미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 하승수, 한티재 2015 책소개 : 허훈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긴 편에 속하는 노동시간, 과도한 비인간적인 경쟁, 사회적 차별과 억압, 그리고 미래에 대한 끝없는 불안과 불평등. 이 모든 것들이 중첩되어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는 ‘다른 삶’을 상상하기 어렵고 ‘주어진 틀’ 내에서만 살도록 만들어진 시스템의 포로가 되어 있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기본소득이 필요하고 이는 위로부터 받는 혜택이 아니라 사회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받아야하는 권리이다.
‘권리’라는 생각이 신선했어요.
지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모두를 위한 일자리(완전고용)은 낡은 발상이라고 본다. 정보화·자동화로 인해 실업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안정된 급여를 보장하는 일자리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객관적 현실을 무시한 얘기라는 것이다. 어차피 대학을 졸업해도 ‘괜찮은 일자리’를 구하기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이다. 대학을 안 가는 청년들은 더욱 심각하다. 찾을 수 없는 임금노동 일자리를 찾으라는, 또한 열악한 조건을 감내하고 임금노동을 강요하는 상황에서는 ’자유‘는 없고, 강요된 노동만 있을 뿐이다. 이런 구조에서 벗어나려면 기본소득을 받아 대학에 가고 싶은 사람은 가고 다른 일을 하려는 사람은 음악을 하거나 대학 외의 공간에서 관심 있는 것을 배울 수도 있다. 기본소득은 극한의 상황에서 버팀목이 되어 ‘노동’의 지위를 강화한다. 열악하고 부당한 노동을 생계유지 때문에 감내하지 않고 제대로 된 노동을 위한 권리행사를 도와주며 문화예술 같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는 다양한 문화예술이 꽃피는 풍요로운 사회와 삶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따라서 소득이 반드시 임금노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공유재로부터 배당을 받는 ’비임금소득‘(가족을 위한 가사노동/돌보미, 시민운동, 자원봉사)도 인정해야 한다. 이는 불평등을 줄이는 효과도 있다. 부자에게는 ‘푼돈’이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는 상당한 힘이 되어 전염병처럼 퍼져있는 ‘불안’을 줄여줄 것이다. 특히 전업주부와 미혼여성, 장애인 같은 약자들의 노후/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소시켜줄 것이다.
일을 하든 안 하든 ’누구나 먹을 권리‘는 있으며 대통령이든, 재벌회장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사회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동등하게 받는 권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기본소득의 재원은 어떻게 마련할 수 있나?
첫째는 증세이다. 현재보다 더 내는 세금을 기본소득재원으로 사용하면 되는데 부동산개발이익환수, 임대소득과세 강화, 금융소득과세 강화, 소득세 최고율 50퍼센트 이상으로 상향조정, 법인세율 상향조정, 탈세 근절, 토지보유세 강화, 상속·증여세 강화, 부유세 도입 등을 추진하면 된다.
토지와 임대소득에 관해 살펴보면 임대료가 높은 지역은 대부분 공공세금이 투자된 공공인프라가 좋은 지역이거나 홍대처럼 문화예술가들이 지역을 활성화시킨 곳이다. 그러나 그 열매는 토지를 사적으로 소유한 토호세력과 권리금 장사치들이 챙긴다. 즉 공공투자/사회구성원으로부터 발생한 이익은 다시 공공이 거둬들여야 한다.
둘째는 기존재정을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토건예산 등 낭비를 줄이고 부자와 대기업에 대한 세금감면을 폐지하면 된다.
셋째는 생태부담금 징수이다. 온실가스 배출, 원전의 핵연료 사용, 폐기물 배출, 지하수의 상업적 사용 등애 대해 공유재인 환경파괴에 대한 생태부담금을 징수함으로써 이를 억제해 나간다.
결론적으로, 도시지역의 경우를 예를 들어 1인 가구에 월 40만원을 제안한다. 빈곤가구, 1인가구 등의 주거정책은 별도의 고민이 필요하겠지만 3~4인 가구의 경우 월 120만원~160만원의 생활비로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조세제도를 바꾸어나가면 우리가 상상하는 기본소득의 시대가 올 수 있다고 본다.
* 사례 : 1. 알래스카 주의 ‘영구기금 배당금’ - 1982년부터 석유개발에 따른 주정부수입을 기금으로 조성/투자하여 얻은 수입을 각각의 주민에게 나이에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배당하고 있다.
2. 탄소배당금(캐나다의 브리티시콜롬비아 주) - 2008년부터 온실가스 배출에 대해 주정부 차원에서 탄소세를 걷어서 그 중 일부를 시민배당금으로 1년에 100달러 정도(저소득층은 100달러 추가)의 작은 규모이지만, 탄소배당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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