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꽤 즉흥적인 사람이다. 진지하게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사실 별 생각 없이 멍을 때리고 있을 때가 많다. 그래서 결정에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장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 나도 고양이를 데리고 올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홍시살이’ 2편에서도 잠깐 이야기했던 것처럼 고려해야 할 사항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나의 결정이 직접적으로 ‘생명’과 관계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숙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오래전 함께 했던 한 마리 개에 대한 기억때문이었다. 그 개는 제대로 된 이름도 갖기도 전에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
첫 직장에서 막 퇴사를 했을 때였다. 그러니까 10년도 더 된 일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었던 시절인데, 생각했던 삶과 경험하는 삶 사이의 간극을 해결하고 싶어서 목적도 없이 밤거리를 헤매다니곤 했다. 그럴 때마다 가끔씩 들어가던 동네의 한 애완견숍에서 그 아이를 발견했다. 중국 황제의 개.라고 불리는 페키니즈였다. 글쎄...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또롱또롱 빛나는 검은 눈을 가진, 하얗고, 복슬복슬하고, 동그랗고, 자그마한 개였다. 케이지 안에서 얌전히 앉아있던 개는 나와 눈을 맞추었다.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아니라면 달리 내 뜻대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없는 시절이기도 했다.
며칠 진지하게 고민하는 척 했지만, 실제로는 즉흥적으로 이미 마음 속에 결정된 일이었다. 결국 퇴직금을 털어 개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부를 이름이 없으니 일단은 ‘개동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개는 역시 마늘이랑 어울리죠”라며 ‘마늘’이라고 부르라던 짓궂은 후배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게 농담인지 뭔지 알 수도 없다) 어쩐지 ‘개동이’라는 이름이 입에 딱 달라붙었다. 그렇게 우리의 비극적이고 짧았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다.
한 장 남아 있는 개동이 사진.
필름 카메라로 촬영해서 현상한 것을
다시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이다.
개동이는 개라기보다는 여우같다는 느낌을 주는 아이였다.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있으면 나를 빤히 쳐다보며 내려오라고 엥엥 거렸다. 바닥에 내려앉으면 한 걸음 물러섰다. 이리 오라고 손을 내밀면 엉덩이를 내 쪽으로 보이며 돌아앉았다. 다가가서 쓰다듬으면 또 엥엥 거리면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도도하고 우아해서 황제의 사랑을 받았던 개라고들 했다. 그래서 외로움은 타지만 곁을 잘 주지 않는, 그런 개인가보다 생각했다.
개동이한테 문제가 생긴 것은 아마도 동거 생활 10일 차 쯤 되었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밤마다 낑낑거리며 설사를 했다. 작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밥도 잘 먹지 않았다. 덜컥. 겁이났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개동이와 나는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기 시작했다. 20일이 넘게 병원과 집을 오가면서 투병 생활을 했고, 부모님 댁에 맡겨서 어머니가 간호를 하기도 했지만, 결국 개동이는 무지개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병원마다 병의 원인을 다르게 말했는데, 마지막으로 찾았던 병원에서는 성견한테만 있는 못된 벌레 때문이라고 했다. 병에 걸린 어미가 열악한 환경에서 낳았다면 아가에게도 옮길 수 있는 병이란 말이었다. 애완견숍에서 ‘사고 파는’ 개의 현실이란 그때도 지금도 그렇게 가혹하다.
개동이가 세상을 떠나고 한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다 내 잘못인 것 같았다. 어린 강아지를 집에 데려다 놓고도 여전히 나는 밖으로 싸돌아 다녔다. 개동이는 오랜 시간 혼자여야 했다. 집에 돌아올 땐 그렇게 친구들을 달고 돌아왔다. 이 사람 저 사람이 어린 강아지를 조물조물 거렸다. 그게 내 즐거움이기도 했다. 한달은 목욕을 시키면 안 된다고 했는데 냄새가 난다며 목욕을 시켰다. 작고 예쁜 강아지가 너무 크게 자랄까 무서워 밥을 조금 밖에 주지 않았고, 더 먹고 싶다고 엥엥거리면 “안돼”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그런 인간이었다. 발병을 하고 나서는 한 병원을 믿고 진득하게 다니지 못했다. 이 병원 저 병원을 옮겨 다녔다. 만약 한 병원에 믿고 맡겼다면, 개동이는 살 수 있었을까? 내가 했던 모든 일들이 결국은 개동이의 죽음으로 이어졌던 것 아닌가...
했던 일들과 함께 하지 못한 일들 역시 엄습해 왔다. 개동이가 나으면 예쁜 핀을 사줘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매일 매일 함께 산책도 하리라 생각했다. 집앞 공원, 놀이터, 슈퍼 같은 곳에 함께 다니는 상상을 했다. 개동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통통통통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며 짖을 것이다.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고, 밤다마 함께 데굴데굴 구르며 놀아야지. 개동아 개동아 이리와, 라고 부르면 새침하게 등을 보이고 앉았다가 못 이기는 척 내게로 다가올 거야.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비실비실 웃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미래’가 우리에게는 없었다. 함께 할 수도 있었지만 하지 못했던 시간들이 공기 속으로 모두 흩어져버렸다. 어떻게든 웅켜잡아 보려고 몇 번이나 손을 쥐었다 폈다 해도, 다시는 잡히지 않을 순간들이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상실감이었다. 이러나 저러나, 다 나의 잘못이었다.
그래서였다. 다시는 책임지지 못할 일은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특히나 생명과 관계된 문제라면. 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변화를 준 하나의 계기가 찾아왔다.
-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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