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에 작성된 글입니다)
청소를 할 때마다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인생은 먼지와 머리카락이다.” 어렸을 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은지, 요즘 청소를 하다보면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 거립니다. “인생은 정말 먼지와 머리카락이구나.” 끄덕끄덕. 아, 참, 근데 제 인생에는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양이털. 그리하여 제 인생은 먼지, 머리카락, 그리고 고양이털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때마다 털을 뿡뿡 뿜어대는, 말 많은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털 뭉치 고양이의 이름은 홍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양이는 도도하고 독립적이어서 혼자 사는 사람이 키우기에 딱이라고들 합니다. 영역 동물이라 동거인에게는 정을 주지 않는다고도 하고, 15일만 지나면 같이 살면서 밥 주고 똥 치우고 물어 뜯기던 인간 따위는 누군지 기억도 못한다고도 하지요. 아마도 어떤 고양이에게는 맞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습니다. 세계의 모든 고양이를 만나본 것도 아니니 홍시와의 1년 3개월만으로 가타부타 말할 수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것이 ‘상식’인 줄 알고 홍시와의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이 녀석, 15일만 지나면 나와 있었던 일은 까마득히 잊는단 말이지?” 그런데 요즘엔 조금씩 그 ‘상식’이라는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걸음 다가가면 세 걸음 쯤 물러나고 한 걸음 쯤 물러나면 반걸음 쯤 다가오는, 이 고양이라는 요물이 밀당의 귀재인 것은 맞지만, 정말 그렇게 금방 나를 잊어버릴 정도로 무심할까? 어쩌면 고양이는 그저, 그 떨어져 있었던 15일 만큼의 거리를 다시 물러나는 것 뿐 아닐까? 라고 말입니다.
홍시는 지난 1년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다가왔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면서 아주 천천히, 그러나 마치 계단을 올라서는 것처럼 때로는 아주 급작스럽게 나와의 관계를 진전시켜 왔습니다. 그건 마치 주도권을 빼앗긴 연애와도 같은 것이었지요.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다가와 꾹꾹이를 했고, 어느 날 갑자기 다리에 몸을 기대기 시작했고, 어느 날 갑자기 무릎에 올라앉았으며, 또 어느 날 갑자기 한 침대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이불 속으로 들어오지 않던 홍시가, 또 어느날 갑자기, 이불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어 살금살금 기어들어 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느끼게 되는 고양이의 체온 38.6도. 인간보다 딱 2도 높다는 그 체온이 전해주는 따뜻함은 때로는 위안이고 때로는 사랑이기도 합니다. 물론 다정한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는 콧방귀를 뀔 정도의 평범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길고양이 출신 도도냥과의 삶에서는 그가 한 계단을 올라와주는 일은 그야말로 가슴 뛰는 ‘사건’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서두르지 않고 자기 속도에 맞추어 그 곁을 열어가는 동물이 정말 15일 만에 이 설레는 과정을 모두 잊어버린단 말인가요? 고양이는 무심한 듯 보일 뿐, 실은 어마어마하게 따뜻한 동물인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고양이의 사랑을 갈구하는 집사만의 착각이자 바람일 수도 있겠지만요.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열어가는 것이 홍시만의 몫은 아닙니다. 홍시만큼이나 곁을 잘 주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종자가 저라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예쁘다, 예쁘다’를 달고 살지만, 홍시를 삶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 저에게도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말이죠. 아이를 키우는 한 선배는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섞여가는 과정을 ‘함께 성장해 가는 과정’이라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홍시와 저의 관계에서 ‘성장’하는 것은 오직 저 뿐인 듯도 합니다. 홍시는 그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속도대로 그렇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일 뿐인지도요. 어쨌거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서로 마음과 음식과 공간을 나누는 ‘반려의 삶’ 속에서 관계라는 이름의 계단을 함께 오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어쩌면 오직 ‘우리 둘’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우리 둘’이라니... 홍시와 ‘우리’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또 다시, 가슴이 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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