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자’ ‘기피자’ ‘비국민’, 그 어떤 이름이든
-《저항하는 평화》(오월의봄, 2015) 편집 후기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4호 기고 글)
《저항하는 평화》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한국 사회의 폭력과 저항에 대한 커다란 지도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그 지도를 보고 결국 찾아갈 길은 명백히 ‘평화’라는 길이다. 지도를 그린 것은 전쟁없는세상이라는 단체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군사주의와 전쟁에 저항하는 활동을 해왔다고 한다. 나는 5년 전쯤 우연히 이 단체를 알게 되었는데,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그야말로 어쩌다보니 이 책을 편집하게 되었다. 우연이므로 내가 아닌 그 누구라도 이 일을 하게 되었을 테지만, 그게 나여서 다행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나에게 다행이었다.
책에는 ‘청년’ ‘징병제’ ‘종교’ ‘젠더’ ‘국민국가’ ‘교육’ ‘비폭력운동’ ‘트라우마’라는 키워드로 각각 펼쳐진 8가지 대담이 실렸다. 사실 장마다 한 문단씩 소개를 적었다가 다 지웠다. 말은 조금씩 달라도 이미 보도자료에 썼던 내용이니까 반복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장마다 색깔이 다르고 각각 얻을 것이 있지만, 여기서는 내게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대목들만 짚고 가볼까 한다.
먼저 ‘[젠더] 거부와 기피를 넘어 탈주하라’ 장은 샤샤와 이길준과 정희진의 대담이다. 정희진은 대담 시작부터 대뜸 ‘여러분처럼 훌륭한’ 병역거부자 말고, 소위 기피자나 도주자로 취급받는, 사회에서 명확한 지위를 갖지 않는 존재들에게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스스로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입장에선 조금 당황스러웠을 이 말은, 그러나 이 장의 문제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병역기피’와 ‘병역거부’라는 틀을 넘어서 어쨌든 군대에 가지 않으려는 다양한 존재들의 세세한 결을 드러내는 일, 촛불집회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병역거부를 한 이길준과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을 바탕으로 병역거부를 한 샤샤처럼, 병역거부의 복잡한 정치학을 언어화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탈주자들이나 소수자 안의 소수자들이 미약하게나마 생각하고 바라는 것들을 언어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소견서를 써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 행동을 언어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군대 가기 싫어, 귀찮아, 이런 것을 사회적 언어로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죠. (...) 그러지 않으면 사회적 의미를 갖지 못한 채 유령처럼 떠돌다 사라져버리거든요. 그들이 맘에 들지 않더라도 최소한 그들과 마주 앉아 대화는 할 수 있어야 해요. (...) 너희에게 이 정도까지 시민권을 부여한다, 뭐 이런 개념이 아니라 이런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사회를 위해서.”(이길준, 172쪽, 181쪽)
이건 사실상 어려운 문제다. 운동의 정체성을 갖지 않은 이들, ‘아 몰라 그냥 안 갈래’라고 말하는 이들, 절절하고 비장한 소견서를 써낼 수 없는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말로 병역거부운동에 보탬이 되나? 오히려 해가 되는 것은 아닌가? 어려운 문제인 것이 당연한데, 새삼스럽게도 이것은 결국 ‘존재’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길준의 말처럼, 명백히 존재하되 다만 틀 안에 집어넣을 수 없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목소리를 살려내는 일은, 때때로 손쉽게 지워지곤 하는 그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인정하는 일과 같다. 언어화가 존재의 문제이며, 살기 위해서는 언어가 있어야 한다는 정희진의 말도 마찬가지 맥락으로 읽힌다.
다음으로 ‘[국민국가] 군대를 안 가면 국민이 아닐까?’ 장은 이용석과 서경식의 대담이다. 서경식은 이 장에서 ‘자발적인 비국민’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문제의식이다. 국가가 부여하는 가장 ‘국가적인’ 의무라고 할 만한 병역의 의무를 적극적으로 거부한 병역거부자들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일종의 ‘비국민’으로서의 길을 택한 사람들이며, 이는 현재까지도 일본이나 한국이라는 어느 하나의 국적에 수렴되지 않은 채 비국민의 삶을 꾸리고 있는 재일조선인들의 처지와도 맞닿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느 국가에 속하지 않아서 이렇게 힘든 것이 사실이에요. 그래서 귀화한 사람도 많고 조선이라는 기호, 국적이 아니라 한국 국적으로 바꾼 사람도 많아요. 그것이 과연 순조로운 과정으로 진행되고 있는가 하면 그건 아니고, 19세기부터 이때까지 있어온, 인간들을 국민화하려는 압력에 마지막까지 버티고 저항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재일조선인이라는 거예요. 잘 안 보이지만 세계 곳곳에 그런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거죠.”(서경식, 238쪽)
“사실 저 같은 경우는 스무 살 넘게 국민으로 살아오다가 한순간에 비국민이 되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 같아요. 국민의 위치에서만 이 나라와 세계를 바라보다가 비국민이 되어서 바라본 세상은 전혀 다른…… 물론 병역거부자여서 받는 차별이나 배제가 있는데 그게 꼭 나쁜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았고, 어떻게 보면 자발적으로 비국민이 된 거죠. (...) 우리가 비국민이 되면서 국민일 때는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오히려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은 비국민에게서 열릴 수 있지 않을까.”(이용석, 232~233쪽)
정희진이 말하는 기피자, 도주자, 탈주자들과, 서경식이 말하는 자발적 비국민은 언뜻 보면 극과 극에 서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둘 다 결과적으로 병역거부를 했다고 하더라도, 또는 그 어떤 거부를 실행했더라도, 한쪽은 겁 많은 구제불능의 인간들, 다른 한쪽은 백 년에 몇 명 나올까 말까 한 용기 있는 사람들로 보일지 모른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겠지만 내 안에도 그러한 생각의 찌꺼기가 조금이나마 남아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그런데 ‘젠더’와 ‘국민국가’ 장을 자세히 읽다보면, 대담자들의 사유를 찬찬히 따라가다보면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기피자와 비국민, 루저와 영웅 사이의 거리가 생각만큼 멀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으며, 때로는 아예 동일인물이다. 서경식은 “세계의 온갖 사람들이 전부 어느 한 국가의 국민이 된다면 그 세상은 지옥”이며, “인간들이 온갖 수단을 다해서 회피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까지 말한다. ‘회피하는’ 앞에 생략된 목적어는 병역이 될 수도 있고, 국민화일 수도 있으며, 그 밖에 자신의 인간됨을 저해하는 모든 억압들일 수 있다. 그 억압, 그 지옥을 기를 써서 회피하고자 하는 것은 기피자든 운동가이든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이용석의 말처럼, 그렇게 회피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이 사회의 국가주의, 군사주의가 약화되고 평화에 좀 더 가까워질 것이다.
군대를 거부한 하나하나의 ‘존재’들을 상상해본다. 군대에 다녀온 이들이 그렇듯이, 이들 또한 천차만별의 사람들일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나는 이 존재들을 한 명 한 명 직접 만나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들 중 어떤 이들은 내가 이 책의 보도자료에 쓴 것처럼 과도한 의미 부여와 경외감을 아주 불편해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니 나를 가지고 말놀음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라고 말하고 싶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편집자로서도, 전쟁없는세상의 후원자로서도, 내 마음을 표현할 적당한 언어를 고르기에 애를 먹는다. 내 말이 틀이 되고, 규정이 되고, 또 다른 억압이 될지 몰라 조심스럽다. 그래도 이 정도 마음은 전해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당신들 하나하나의 거부를, 회피를, 부정을 좋아한다고. 당신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 나에게 당신의 존재가 용기가 된다고.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부디 책을 좀 사달라는 것이다. 사주시면, 이 책의 저작권자인 전쟁없는세상과, 어쩌자고 이런 책을 내놓기만 하고 대책이 없는 출판사의 살림에 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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