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별의 자전과 공전,
사랑의 영구혁명을 위하여”
변홍철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사계』가 출간되었다. 첫 시집 『어린 왕자, 후쿠시마 이후』(2012)에서, “현실의 모순을 지적하면서도 삶을 추스르는 태도를 더불어 유지하려 애쓴” 시인은 “강인한 의지의 껍질을 가지고 안으로 삭힌 서정의 속살”(이하석)을 보여주었다. 신작 시 61편을 엮은 이번 시집에는 계절과 절기에 따른 삶의 모습과 서정이 담겨 있다.
자연의 순환, 땅에 속해 있는 인간의 조건에 대한 감각이 갈수록 희미해지는 우리 삶은, 그래서 근원적인 상실감과 불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공존이라는 주제에 천착해 온 변홍철 시인에게 ‘사계’는 삶과 죽음, 끝없는 노동과 투쟁에 대한 은유로 다가온다. 그것은 인간에게 ‘천형’이자 ‘구원’의 근거이기도 하다. 그런 오래된 순환의 감각과 겸허함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 시의 새로운 임무일지도 모른다. 시인은 그러한 시적 분투를 ‘사랑의 영구혁명’이라 말한다. 사랑이야말로 영원한 혁명이며, 혁명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지 않는가.
논에 옮겨 심은 모들이 자란다 / 줄을 맞추어 땅을 움켜쥔 잔뿌리들의 / 저 촘촘한 노동 / 이 별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가능하게 하는 영구동력은 무엇일까 / 언제나 궁금하였다 / 광활한 어둠 속에 산산이 부서지지 않고 버티는 / 푸른 원주(圓周)의 안간힘 (「하지」 전문)
계절의 형상과 현실에 대한 응시
시인이 노래하는 계절의 형상은 “계절들이 환기하는 일반적인 이미지를 탈피하여, 시인이 응시한 현실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현실은 아직 ‘희망’을 노래하기에 녹록치 않지만, 그의 작품들에는 힘겨운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짙게 묻어 있다. 때로는 계절의 형상을 통해 안타까운 역사를 소환하여 제시하고,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는 화자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김용찬, 발문).
무성한 여름의 성(城)이여 // 너희를 무너뜨릴 힘이 / 슬픔의 단층을 따라 이미 움직이고 있다 // 꽃잎이 질 때마다, 꽃잎이 질 때마다 / 삼켜진 울먹임의 에너지를 감지하지 못하는 / 신록의 낙관이여 // 계절이 돌고 돌아, 또 다른 꽃이 필 때마다 / 새로운 바람은 불 것이다 // 저 못자리에서 자라나는 싱싱한 저주(咀呪) // 그러므로 나의 직업은 / 영원한 파멸의 서기(書記)라도 좋다 // 여름은 또 한 번의 패배여도 좋다 (「입하」 전문)
시인에게 절기와 계절은 단순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시간 속에 놓인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계절의 의미를 자신의 방식대로 그려 내고 있다.
“부디 모든 아픔은 나에게로”
순정한 시로 가난한 세상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다
네 칸짜리 우리 기차는 마주 오는 기차와 비켜 가기 위해 잠시 정차했다 가겠다고 하면, 평소 스쳐 지나가던 간이역과 그 뒤의 비구름 두른 산들, 향나무 아까시들이 차창 가로 우르르 모여들어서는 저마다 광주리에 담긴 이야기, 아무도 들어주지 않던 상처 난 열매 같은 얼굴을 한번 맛이나 보라고 코앞에 들이밀고, 떠나지 못한 허한 어깨 위로 김이 피어오르는 늙은 이팝나무 몇, 뚝배기를 슬며시 내미는 아침, 아직 피지 않은 밤꽃 향기도 저만치 저희끼리 숨어 웃는 (「율동역」 전문)
또한 시인은 이웃들을 보듬어 안으며, “순정한 시로 가난한 세상을 부축해 일으켜 세운다”(문태준, 추천사). 상처 난 열매 같은 얼굴을 한 이웃들과 함께하며, “부디 모든 아픔은 나에게로”(「무언곡」 부분)라고 뜨겁게 말한다.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벗들과 / 조용히 나누는 악수 같은 / 호들갑스럽지 않고 다만 / 굳은살 같은”(「그런 시」 부분) 시를 쓰고 싶어 하는 시인의 “강기(剛氣)가 있으면서도 한없이 여린”(문태준) 마음을 이번 시집에서 만날 수 있다.
■ 저자 소개
변홍철
1969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살았다. 고려대 국문과에서 공부하며 동인지 『저인망』으로 시작(詩作)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도서출판 한티재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동국대 경주캠퍼스 국문과 겸임교수로 출판에 관해 강의하고 있다. 시집 『어린왕자, 후쿠시마 이후』, 산문집 『시와 공화국』이 있다. 대구경북작가회의 회원.
■ 추천의 글
계절들이 환기하는 일반적인 이미지를 탈피하여, 작품에 반영된 계절의 형상은 시인이 응시한 현실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 현실은 아직 ‘희망’을 노래하기에 녹록치 않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들에는 힘겨운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짙게 묻어 있다. 때로는 계절의 형상을 통해 안타까운 역사를 소환하여 제시하고,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는 화자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적어도 그에게 계절은 단순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시간 속에 놓인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계절의 의미를 자신의 방식대로 그려 내고야 말겠다는 시적 의지를 표출한 것이다.
김용찬 (순천대 국어교육과 교수)
내가 기억하는 변홍철 시인은 “함성과 투석전과 피 흘리던 청춘과 광장”(「골목에서」) 그것이었다. 대학시절에 그는 야무지고 부드러운 선배였다. 이번 시집에서도 시인은 “여름은 또 한 번의 패배여도 좋다”(「입하」)라고 당차게 말하고, 이웃들의 “상처 난 열매 같은 얼굴”(「율동역」)을 보듬어 안는다. 그리고 순정한 시로 가난한 세상을 부축해 일으켜 세운다.
이 시집은 사랑의 빛으로 촛불처럼 타오르며 “부디 모든 아픔은 나에게로”(「무언곡」)라고 뜨겁게 말한다. 시집을 읽는 동안에 나는 강기(剛氣)가 있으면서도 한없이 여린 한 사람을, 진솔하고 아름다운 한 사람을 보았다.
문태준 (시인)
■ 차례
제1부
영주행 / 무언곡 / 순천만 / 겨울 나무 / 입춘 / 이불 빨래를 널며 / 회춘 / 봄눈 1 / 봄눈 2 / 통영 / 벚꽃 아래에서 / 작업의 기술 / 곡우 / 빈자리 / 혀끝에 서걱대다 / 율동역 / 입하
제2부
유월 / 골목에서 / 망종 무렵 / 하지 / 붉은 달 / 대한문 / 부드러운 가시 / 소서 / 설거지 / 감꽃 /
자유 / 잔치국수의 보수성 / 대서 / 배롱나무에 부치다 / 로드킬 / 입추 / 깃발 / 석류 1 / 석류 2
제3부
수제비 / 낮잠 / 백로 무렵 / 숨비기꽃 / 추분 / 붉은 시월 / 경쾌한 산책 / 해장국 / 상강 / 툭 / 국화차 / 단풍 / 쏙독
제4부
입동 / 러브로드 / 소설 무렵 / 그 방에서 / 사막으로부터 / 겨울 판화 / 우리의 비무장지대는 / 점멸 / 동지 / 대한 무렵 / 세밑 / 그런 시
발문 ・ 김용찬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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