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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 연재마당/땡땡 서평단

<국가 없는 사회> 서평 by 유해정

국가존엄의 이중주는 가능할까?

<국가 없는 사회>(에리코 말라테스타 지음, 하승우 옮김, 포도밭출판사, 2014) 서평

-유해정(인권연구소 활동가)


너무나 동시대적인 100년 전의 대화

올해 환갑을 맞은 황필호(가명) 씨는 전쟁고아다. 부모님 얼굴은 고사하고 유류품 하나 없이 살아온 그의 생의 첫 기억은 8살 무렵 영화숙에서 시작된다. 부산에는 길거리와 기차역, 다리 밑에서 단속한 부랑아, 걸인, 노숙인 아동들을 수용하는 영화숙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곳은 사복지시설을 표방했지만 사실상 소년원과 다를 바 없는 혹독한 공간이었다. 배고픔과 학대를 견디지 못한 꼬마 황필호는 몇 차례 영화숙을 탈출했지만 번번이 다시 잡혀가 심한 매질을 당했다. 소년이 됐을 때 그는 재생원에 인계돼 수용됐고, 성인이 될 무렵에는 형제원으로 끌려갔다. 20대 중반까지 그는 이름만 달리한 수많은 사회복지시설에 감금돼 채찍을 맞아가며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고아란 이유로 이 모든 폭력은 정당화됐고, 이 시설들이 부정부패에 가혹한 인권침해 논란으로 폐쇄됐을 때야 비로소 그는 자유인이 됐다. 하지만 스무 해가 넘게 국가에 의해 시설에 붙들려 살아온 그에겐 학력도, 배운 기술도, 모은 재산도, 가족도 없었기에 그는 그 뒤 30여년을 건설현장 일용직 잡부로 전국을 떠돌았다. 50만원에 8만 원짜리 셋방, 그리고 두 손으로 들 수 있는 가방 몇 개가 지금 그의 육십 생에 남겨진 전부다. 2003년 수소문 끝에 찾아낸 아버지가 6.25 전쟁당시 해군장교로 복무하다 사망했다는 사실이 그의 상처투성이 삶의 위로라면 위로. 그래도 그나마 그는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가 거쳐 온 시설 중 하나인 형제(복지)원의 경우만 하더라도 20년이 넘는 운영기간 중 사망한 수용자가 최소 513명에 달한다.

국가가 그에게 무엇인지를 묻자 그는 돈만 있으면 이민을 갔을 것이라고 답했다. 자기를 잡아넣은 박정희가 죽었을 때 각하가 죽었다고 대성통곡했던 자신이 참 무지했다고 통탄하는 그에게 남은 소망이라곤 자신이 사회악으로 여겨졌던 부랑인이 아닌 전쟁 통에 부모를 잃은 고아로 호명되는 것, 하여 국가로 인해 고아가 됐으나 보호는커녕 처참히 짓밟힌 국가폭력 피해자라는 명예회복이다. 국가의 진심어린 사과만이 그의 한을 덜어낼 수 있건만 예나 지금이나 그는 국가에게 보이고 들리는 존재가 아니다.

황필호 씨의 사연은 비단 과거의, 특별한 개인의 사례가 아니다. ‘지금-여기에 강정에서, 밀양에서, 그리고 세월호에서 많은 사람들이 국가란 무엇인가를 되묻는다. 또한 기본적 노동권조차 보장되지 못하는 일터에서, 학생이라는 이유로 단속과 폭력에 노출된 학교에서, 성희롱과 성폭력을 감수해야하는 사회에서, 존재의 소중함보다는 존재의 필요성을 입증하라 모욕하는 일상에서, 우리는 과연 우리를 지켜줄 국가란 존재하는가를 되묻게 된다. 그것이 부질없는 기대라 체념하는 순간에도 말이다.

포기와 좌절, 하여 얻어지는 결론이라곤 자력갱생밖에 없다 확신하는 시대에, ‘내가 위기에 처할 때 국가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고등학생의 7% 만이 긍정적인 답을 던지는 시대에,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국가 없는 사회에 대한 새로운 사유와 실천을 북돋아주는 책이 나왔다.

<국가 없는 사회>(에리코 말라테스타 지음. 하승우 옮김. 포도밭. 2014)는 한 세기 전 이탈리아의 레닌(말라테스타는 자신은 결코 지배자, 폭군이 아니라며 그러한 표현을 거부했다)이라 불렸던 아나키스트 에르코 말라테스타가 격동의 시대를 살아나가며 쓴 책이다. “평생 일을 멈추지 않은 노동자이자 무장봉기를 이끈 지도자, 총파업을 꿈꾸며 인민을 조직한 활동가라 소개된 말라테스타는 혁명을 꿈꾸다 수차례의 투옥을 경험했지만 혁명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아나키스트와 혁명, 국가 없는 사회에 대한 선전 및 교육활동을 위해 23년에 걸쳐 이 책을 썼다. 책은 가상의 인물인 아나키스트 조르조(말라테스타의 분신일 게다)가 어느 카페에서 열일곱 밤에 걸쳐 다양한 인물들과 어울려 나누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거침없는 논쟁과 대화를 담았다. 백년 전에 쓰인 이 책은 책의 무대가 지금-여기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만큼 동시대적이며, 얇으나 심오하고, 단순하나 매섭다. 물론 그러한 동시대성과 날카로움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지만 말이다.

 

자본주의와 지배 없는 사회혁명

말라테스타는 조르조의 입을 빌어 왜 대의제가 근본적으로 인민의 의지를 반영할 수 없는지, 공권력은 왜 국민을 억압하는지, 부인 불가능한 국가의 이로움으로 인식되는 공공서비스는 어떻게 지배의 도구로 전락하는지, 경제체제를 변화시키지 않는 혁명은 왜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지 등을 매우 쉽고 간결한 언어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을 통해 국가(정부) 없는 사회에서만이 인간이 온전한 자유와 자치를 누릴 수 있음을 역설한다.

그가 주장한 국가 없음이란 정부의 개혁, 혹은 정부란 통치 기관의 폐지를 넘어선다. “과거와 완전히 결별하는 사회혁명으로 우선 소유제도의 완전한 변화, 생산과 교환체제의 완전한 변화”(29)를 지향한다. 이는 노동자가 자기 노동의 생산물 전체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는 전제 위에서 노동에 따른 착취를 없애고 모든 사람이 일하고 자신들이 합의한 관행에 따라 자기 노동의 성과를 즐겨야”(61)함을 의미한다. 인민의 경제적인 조건이 실질적으로 동일하지 않다면 생산수단을 독점한 기득권층에 의해 인민에 대한 지배는 재게 될 수밖에 없다. 하기에 자본주의 체제란 경제체제를 넘어선 다른 사회제도들의 근간으로 이를 폐지하지 않고서는 억압과 지배를 자율과 자치로 대체할 수 없다.

또한 국가 없음이란 사회를 위에서 지배하고 자신의 의지를 강제로 요구할 수단을 가진 기관의 폐지, 법을 만들고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강요하는 권력의 폐지를 의미한다(79). 대의제와 선거제도가 지배를 강요하는 권력의 원천이라 비판하는 그는 자유로운 사회에서의 권력의 위임은 아주 특수하고 일시적인 일이자 한정된 의무”(82)라고 규정하고 이러한 권력의 결정은 언제나 그들이 대변하는 사람의 승인을 받아야만 정당화될 수 있다고 못 박는다.

권위 없는 사회란 불가능하다는 비판에 그는 사회란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것이라 답한다. 이런 평등이 인민들의 자유로운 협약을 보장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인민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공존하는 사회적 존재라는 점에 근거한다. “인류애를 향한 의지가 없다면 인류가 존재할 수 없다는 토대 위에서 서로 전쟁을 벌이고, 증오하고, 착취하는 것이 모든 걸 잃게 만든다는 점을 인민 이해하도록”(88) 만들 필요가 있다. “각개인의 권리를 엄격하게 존중하는 것보다는 우애적인 동의와 연대”(61)에 기초해 인민이 서로 돕고 연대하는 사회질서를 바라도록 설득”(88)하는 것이 불가능을 넘는 해법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는 뭔가를 더 할 수 없는 나쁜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혹여 혁명이 성공하더라도 우리 안에 내면화된 나쁜 열정들- 폭력으로 타인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고 싶은 유혹, 자신을 위한 특권을 만들기 위해 좋은 조건들을 활용하려는 욕망, 일하기가 강요된 노예상태에서 생긴 혐오 등-이 한꺼번에 사라지지 않을 것 역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혁명을 기도한다. “인민이 자유의 시간을 경험하고 자신들의 힘을 판단”(124)하게 되면 결코 혁명 이후의 시간은 과거와 동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의식적이고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지배자들에게 저항하지 않는 한 어떤 사회 상태든 충분한 근거들을 가지기 때문에 영원히 지속될 수 있”(111)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조르조의 주장은 매우 익숙한 듯하지만 그가 살았던 시기가 한 세기 전이라는 점에서, 또한 비판과 체념을 넘어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정을 담금질 한다는 점에서 그의 말과 사유엔 힘이 있다. 아나키스트 사상의 좋은 입문서로만 치부하기엔 인민의 힘에 대한 믿음이 있다. 옳고 좋은 이야기라고 퉁치며 책을 덥고 돌아서기엔 모욕당한 삶을 부둥켜안고 제발 내가, 내일이 벼랑 끝이 아니기를 기원하며 하루하루 버텨야하는 현실이 있다.

하여 국가 없는 사회란 아나키스트들의 부질없는 몽상이라 뒷걸음치는 순간 그는 말할 게다.

그럴 경우 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고, 자신을 둘러싼 냉혹한 폭력에 항상 노출될 겁니다. 그래요, 그게 현실이죠. 민중은 자유로워지기 위해 무얼 하면 되는지 모르거나 설령 알더라도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을 하길 원치 않아요.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노예이지요”(102)

 

국가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

국가가 존재하기는 하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고, 이따위 국가라면 망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살았으면서도 때때로 나는 나도 모르게 이런 국가라도 있는 게 어디냐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인권적 관점으로 사회를 바라보면서 국가에 대한 비판도 거세졌지만 또한 동시에 국가가 보장하는 인권 체계에 대한 바람도 커졌기 때문이다. 일찍이 국가 없는 이들에겐 인권조차 없다고 저명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하지 않았던가?

동시에 자본주의를 보완 혹은 극복하고자 하는 흐름들, 공공재, 협동조합, 사회적 경제/회계, 공정무역, 사민주의 등을 경험하거나 듣고 보았을망정(물론 그것이 시장체계에 의해 조금씩 변형되었을지라도) 법과 치안체계 없는 사회에 대한 이야긴 보고 듣지조차 못했기에 국가 없음은 무질서와 극도의 혼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만 인식될 뿐이다. 내가 신뢰하는 우리끼리를 넘어 사회 전체 구성원의 자율과 자치를 믿는다는 건 입에 발린 달콤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믿음보단 여전히 불신과 의구심의 자리가 더 크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우리는 국가에 포획된 삶을 태어나면서부터 살아왔기에 국가에 길들여져있다. 인민의 자치와 자율의 역사는 모조리 부인되거나 삭제되었고, 내 삶은 물론이고 동네의 갈등조차 스스로 해결해본 경험이 없다. 간혹 인민의 힘으로 사회를 바꾼 역사가 있긴 하지만 변화는 잠시였을 뿐이고, 지배는 시공간에 따라 날로 세련돼졌다. 더구나 꿈이 아무리 원대하다 한들 우리에게 자본과 공권력으로 무장한 국가를 넘어설 힘이 있는 가란 질문 앞에서 발걸음은 주춤해진다. 그러하기에 국가의 구성원 대부분이 지금 우리가 처한 위험과 교정 불가능한 국가의 부정의함을 알면서도, ‘국가가 비난받아야한다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실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계속 국가가 하는 집단적인 구원의 약속을 저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푸코는 국가가 인간의 실천과 사유 속에 들어온 것은 불과 3~4세기 밖에 안됐다고 주장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국가는 다양한 통치방식 중 하나의 유형일 뿐이다. 다층적이고 다양한 권력관계가 얽히고설키는 과정에서 통치의 실천에 입각해 구축된 장, “통치술의 우발적 사건이 국가인 것이다.

<국가 없는 사회>의 번역자이기도 한 하승우는 <민주주의에 반하다>에서 우리는 존엄을 포기하고 껍데기뿐인 주권을 누리는 것이 현명한 방안처럼 사유되어온 시공간에 서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의 힘이 결코 약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힘을 가질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무력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강력하게 중앙집권화 된 국가에서, 공동체가 파괴되어 서로 적대적으로 경쟁하며 살아야하는 고립된 개인의 사회에서, 매일매일 자존심을 짓밟히는 노동을 하며 살아야하는 노동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의 힘이 약한 것이다. 우리 스스로를 억압하고 얕잡아 보며 외부의 힘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민중과 시민의 힘이 약한 것이다.”(<민주주의에 반하다>, 86)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핵심은 국가가 아니다. 우리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통치를 어떻게 거부하느냐, 고립이 아닌 상호의존과 협력을 어떻게 고취하느냐, 그리하여 우리의 힘을 키우고 자치와 자율을 우리 끼리를 넘어선 사회의 전체의 중심 원리로 세우느냐가 핵심이다. 말라테스타가 <국가 없는 사회>를 통해, 그의 온 삶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지 않았을까?

 

다시 처음이다. 내가, 사람들이 묻는다. 국가 없는 사회란 존재하는가? 실현가능한가? 그건 한낮 몽상에 지나지 않는가? 백이면 백이 답할 거다. 그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질문을 바꾼다면 답도 달라질 게다. 그리 오래된 국가의 존속, 번성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의 조건은 나아지고 있는가? 더 모욕적이고 비인간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건 아닌가? 대체 언제까지 존엄을 짓밟히는 삶을 견딜 것인가? 내가 벼랑 끝이 아님에 안도할 것인가? 이대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면, 새로운 사회를 구상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성공여부를 떠난 인간으로서 살기 위한 생존의 절박함으로 기도되어야하는 일이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의 한 구절을 이 맥락에 맞춰 인용, 조금 변형해보면) 우리의 인식을 바꾸는 일이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것이다.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매는 이 막다른 길을 다시 측정하는 것이다. 그처럼 가혹하게 미래를 저당 잡히면서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약속을 믿는 일을 그만두는 것이다”. 결국 앎이 신앙(국가가 영원할 것이라는)을 이겨내도록 만드는 것이며, ‘국가이후에도 삶이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일이다.(<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 387)

나 역시 매번 흔들리겠지만 기대가 아닌 희망을 일구는 그 길 위에서 당신과 만나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