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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 연재마당/땡땡 서평단

밀양을 살다(오월의봄, 2014)



  • "밀양, 스스로 희망이 된 사람들"
  • 『밀양을 살다』(밀양구술프로젝트, 오월의봄, 2014)
-유해정


(인권재단 사람 뉴스레터 #011 게재)

얼마 전 밀양에 다녀왔다. 《밀양을 살다》 발간 기념으로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할매와 할배 그리고 주민 분들께 책을 전해드리고 촛불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책을 준비하고 발간하기까지 꼬박 4개월. 겨울눈이 소복이 뒤덮었던 산천에 초록이 내려앉았다. 경치 좋게 마을을 감싼 감나무의 푸른 잎들이 봄소식을 전했지만 “저거 되면(송전탑이 완성되면) 이 감, 딸 수나 있나 모르겠다”는 할매의 탄식에 봄은 저 멀리 달아나있었다. 책이 만들어지던 시간동안 밀양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송전탑이 올라간 만큼 합의한 이들이 늘어났고,《밀양을 살다》의 한 꼭지를 차지했던 한 인터뷰어는 합의를 주도하는 가족 때문에 마실에서도, 집안에서도 죄인처럼 숨어 지냈다. 예고된 강제철거 앞에서 이제 4곳 밖에 남지 않은 농성장은 하루도 불 꺼질 날이 없었고, 농성장을 지키던 주민들은 한 자락 남은 말과 웃음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밀양에 발을 디딘지 불과 몇 시간 만에 가슴에 돌덩이가 들어앉았다.

 

‘밀양 구술 프로젝트’는 무언가를 해야 했던 마음들이 모여 2013년 12월에 시작됐다. 밀양 송전탑 소식을 들을 때마다 덜컥 내려앉는 마음을 붙잡기 위해, 잔인한 국가폭력과의 싸움에 대표선수로 내몰린 밀양주민들과 함께 살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했던 우리들. 길을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잘 전해지지 않는 밀양의 목소리를 담아보자는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국가폭력의 희생양 혹은 전사로 이분화 된 시선 밑에 감춰진 밀양 주민들의 고유하고도 다양한 삶과 일상을 기록해보자는 이야기 속에서 ‘밀양구술 프로젝트’가 시작됐고, 지난 4월 《밀양을 살다》를 펴냈다. 책에는 오늘 밀양을 살아내고 있는 16명의 이야기가 담겼다.

 

일제식민지 시대,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열일곱, 열여덟 나이에 시집을 가야했던 이가, 보도연맹으로 남편을 잃은 것도 모자라 월남전에서 부상을 당한 아들을 평생 뒷바라지 해야 했던 이가, 대형마트에 밀려난 이가, 1997년 금융위기 때 직장을 잃고 귀농을 해야 했던 이가 책을 빼곡히 채운 주인공들이건만 그리하여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한국 근현대사의 삶을 오롯이 살아내야 했던 이들이건만 국가는 이들의 삶을 지켜주기는커녕 무참히 짓밟고 있었다. 무거운 짐 바구니를 하도 이고 다녀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빠지고, 평생 놓지 못한 호미자루에 손가락이 휘고, 농사일에 허리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며 매년 한마지기씩 늘려온 땅 한마지기, 한마지기였건만 국가는 이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려는 욕심이라며 모욕했다. 소박하지만 선산 있고, 공기 좋고, 작은 터전도 있으니 나이 먹어가는 자손들이 나 가고 나면 여와서 살면 좋겠다며 꾸던 꿈을, 순리대로 이치대로 욕보며 정직하게 걸어온 인생을, 건강을 되찾게 해준 자연을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싹둑싹둑 베어냈다.

 

울력과 정으로 살아내던 마을에 증오와 미움의 씨앗을 뿌리고 송전탑을 세웠다. 하기에 한평생 살아온 땅과 고향, 그리고 삶의 방식을 지키기 위해 시작된 송전탑 투쟁. 8년의 시간 속에서 많은 이들이 손 털고 떠나갔지만 남은 이들은 끝까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밤 낮 없이, 도대체 무엇이 일상인지조차 모르게 싸우는 지금이 벅차기만 하지만 “포기했다고 행복해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거 추접은 돈 받아 모할 낀데”라며 “우리가 끝은 아닐 것”이라 말한다. 하루에도 열 두 번 희망이 있나, 없나 오락가락 하지만 이들은 누군가 문제를 해결해주길 앉아서 기다리기 보단 스스로 희망이 된다. 자신의 힘대로 욕보며, 잊지 않고 밀양을 찾아주는 이들의 손을 꼭 잡으면서, 오늘도 가장 힘센 자와 가장 힘없는 사람들의 싸움은 계속된다.

 

《밀양을 살다》에 꾹꾹 눌려 담아진 이들의 삶은, 밀양 송전탑 투쟁의 숨은 뜻은 물론 자본과 소비에 종속돼 자치와 자급을 잃어버린,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삶의 방식을 망각해버린 우리의 일상을 되돌아보게 한다. 또한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국가의 야만적 민낯을 서슴없이 드러낸다. 하기에 《밀양을 살다》는 동시대에 가장 비동시대적인 단면이자,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자 하는 오늘의 진실에 대한 증언이다.

 

이제 밀양에 일상을 되돌려 줘야하지 않을까? 외면하고 부인하기엔, 질끈 눈 감고 침묵하기엔, 8년은 너무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