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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 연재마당/땡땡 서평단

[서평모임-4월의 주제 '10년 전 읽은 책'] 곽재구, 《사평역에서》

나에게도 오월이 있을까

-곽재구 시집 사평역에서


양똘 




입에 담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내가 평생을 살고심지어 한 번 더 산다고 한들 이해할 수 있을까 싶은 일들이 있다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했고 나는 거기에 빚을 진 채로 살고 있지만아니 살고 있기 때문에 좀처럼 말하기 어려운 일들그것들을 통칭해서오월이라고 불러도 될까.

나는 1985년에 태어났다내가 태어나기 5년 전쯤에도 그런 오월이 있었다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걸 의식하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1980년 5월 18일이라는 활자는 교과서에서또 다른 교육 자료들에서 예사로 보았겠지만 주변의 일상에서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일은 명백히 없는’ 일이 되고 만다.

그래서 오월을 말하는 일은 중요하다아니, ‘오월을 말할 때만 오월은 비로소 오월이 된다작년에 소설가 한강은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소년이 온다를 출간했다그 책을 읽을 때또 주변 사람들과 그 책 이야기를 나눌 때 가장 많이 던진 질문은 이것이었다. ‘오월을 이렇게’ 말해도 될까나는 이렇게’ 읽어도 될까이렇게 울어도 될까울음은 오월에 대해 적합한 반응일까우리는나는, ‘오월에 얼마만큼의 예의를 어떤 식으로 갖춰야 할까이 모든 질문들에 명확히 답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나는 이 중견 소설가가 아무 해에 평소 스타일대로 오월’ 이야기를 해주어서 좋았다. ‘오월이라는 절대성이 저 높이 빛나고 있고 개인은 그것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구도가 아니었다오히려 오월이 이미 자기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에서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느낌이었다그래서 과하다고 느껴지기는 해도 부자연스럽지는 않았다누군가는 그런 건 오월이 아니라고 비난할지도 모른다위험한 방식이라고. ‘오월은 그렇게 쉽게 건드릴 게 아니라고.

요며칠 나는 곽재구 시집 사평역에서를 다시 읽었다이 책의 초판이 나온 것은 1983년 5월의 일이다시집에는 ‘5월시라고 이름붙인 동인시 1, 2, 3집과 미발표 시들을 포함해자연스럽게 오월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들이 실려 있다시마다 끝에 달린 발표 시기를 눈여겨보게 되고가슴 한편이 찌릿하다. 1981~1983년에 슬픔무기력과 싸우면서 시를 쓰는 사람이 눈앞에 생생히 떠오르기 때문이다광주민중항쟁을 담은 최초의 르포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1985년 출간되고 나서 당시 저자로 이름이 나간 황석영이 연행됐으며 책을 전량 압수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80년대 초반의 엄혹한 분위기와 절망 속에서 그에 관한 글을 쓴다는 일이 어떠했을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반면 우리는 그 오월과 멀리, ‘오월’ 앞에 한없이 부끄러울 만큼 편하게 살고 있나그래서 그것에 대해 차마 말할 자격이 없나그렇다면 오월과 한층 가까웠던 당시는 어땠을까?

 

세상에서 흔히 얘기하는 대로 나는 경의선 피난열차 지붕 한번 쳐다보지 못한 태평한 전후세대이므로 지금은 늦은 여름밤 열세 평 아파트의 벽돌방에 틀어박혀 TV를 본다 // 대학문을 나오고 고정급료를 받고 눈 오는 피난열차에서 아들 하나와 한쪽 눈을 잃은 어머니와 의료보험 수혜를 받고 낙동강 전투에서 관통당한 아버지의 연금을 받고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분노 하나로 지난여름의 TV를 본다 // 그러나 나는 언제나 허세이고 위선일 뿐이다 내가 낮에 나가는 고등학교에서 나는 국어선생이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한번도 떳떳하게 파블로 네루다의 시 한 줄과 김구 선생도 읽어주지 못하고 더구나 이 시대의 사랑과 자유와 역사의 쓸쓸함이 모국어와 지니는 함수관계 같은 것을 말해본 일이 없고 / (중략) // 모든 것이 태평한 전후세대 /아이들은 이제 번거로운 분노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메리카와 소비에트와 짓밟힌 유월의 추억은 지나간 옛 역사처럼 늘 도로아미타불일 뿐 눈을 뜨고 바라보는 이 땅의 어디에고 옛 싸움을 잃어버린 슬픔들은 득실댄다 // 아무것도 태평하고 태평하지 못한 전후세대 그러나 옛 역사와 오늘의 슬픔 속에서도 나는 믿는다 늦은 밤 도시락보를 들고 버스를 오르는 사람들의 눈빛과눈 쌓인 아침 책가방을 돌리며 학교로 달려오는 아이들의 모습 속에는 언제나 갑오년 만세소리와 십구년 봄 함성소리가 스며 있다 죽창 하나와 주먹 하나로 맞부딪친 지난날의 분노와 깨우침이 되살아 있다.

<어느 날 TV를 보며 1> 전문

 

이 시에서 몇 가지 정보만 바꾼다면 2015년 어느 지식인의 자조 어린 성찰이라고 봐도 자연스럽다아니그렇게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겠다내가 지금 오월이 어쩌고 글을 쓰고 있지만 일상은 날마다의 야근에 찌들어 있을 뿐이고세상에 말도 안 되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중에도 모든 것이 대체로 태평하며 번거로운 분노” 따위는 접어둘 때가 많다는 것하물며 사랑과 자유와 역사에 대해서 말할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들킨 기분이어서 뜨끔하고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했다.

그러나 시인은 말한다. “태평하고 태평하지 못한” 우리들에 대해서. “옛 싸움을 잃어버린 슬픔” “옛 역사와 오늘의 슬픔 속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소시민들에 대해서이 시뿐만 아니라 시집의 많은 시들에서 그러한 시선이 드러난다임철우의 동명소설로도 유명한(친구의 시에 감명받아 소설화했다고 알고 있다표제작 <사평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사평역에서부분

 

10년 전 이 시와 동명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나는 막연히 막차를 기다리는 눈 내리는 시골역의 서정에 감탄했던 것 같다지금은 다른 것에 주목하게 되는데바로 이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청색의 손바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이다임철우가 소설로 그려낸 것을 보면이 사람들은 서로를 알지 못하고 각자의 사연에 따라 우연히 이 역에서 잠깐 스쳐가는 사이다이 우연한 접점은 그러나 우연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이제는 든다지금 당장에는 각자 자기만의 개인적인 사정들이 있지만그 이전에 그들은 이 ’ 위에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이다이 이란 (역사라고 부르든시대라고 부르든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 묻힌 아픈 땅이면서그래도 좀처럼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듯 하루하루 힘을 내 끝까지 살아가야 할 삶의 터전이다.

시인은 오월이라는 거대한 슬픔의 장벽 앞에서 그것을 경외하고 신성화하기보다는 그리운 고향, ‘그리운 남쪽으로 이야기한다그리고 오늘도 눈앞을 스쳐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고향을 본다그에게 오월은 정신이기 이전에 사람인 게 아니었을까.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역사에 대한 신성화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생각해왔다그것이 넘어설 수 없고 함부로 만질 수도 없는 장벽이 될 때거기서 그칠 때 나하고는 관계없는 것이 되고 만다그래서 언제까지나 나의 화두는 이것이다이런 나에게도 오월이 있을까.이런 나도 오월을 말해도 될까내가 살고 있는 시대는 과연 오월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