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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 연재마당/땡땡 서평단

[서평모임-3월의 주제 '한국소설'] 황정은, 《파씨의 입문》

조그만 사랑의 시작

-『파씨의 입문 황정은 소설집, 창비 2012

 

순돌

 



세상은 무정한 곳이어서 한때 친형제도 외면하고 있던 상황에” “친척으로서는 정말최선을 다해주”(야행」 28)었던 아우 내외에게도 처지가 달라지면 푸대접을 면키 어렵다황정은 소설 속 인물들은 때로 불청객이 되어 자신을 반기지 않는 세계의 적나라한 민낯 앞에 던져지고 만다밤길을 헤매 어렵사리 친지를 찾은 중년 부부는 모진 문전박대를 당하고노인은 방문객에게도자식에게도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겨질 따름이다(묘씨생).

하지만 이 보잘것없고 초라한 존재들이 서로 사랑을 할 때무정한 세계의 풍경은 조금 달라진다야행의 아우 내외는 잠들려다가도 깨서 원치 않는 손님이 찾아오지 않도록 불 단속을 하지만대니 드비토의 유도 씨는 죽으면 쓸쓸할 테니 자신의 혼을 붙여달라는 연인의 진심 섞인 농담에 얼마든지 붙으라고 답한다야행」 속 중년 부부의 애걸은 차갑게 외면당하지만 대니 드비토에는 연인의 농담 속에 숨겨진 작은 진심에도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려 깊음이 있다.

 

이봐./백씨가 문득 잠에서 깬 것처럼 말했다./불을 끄라고누가 또 문을 두드리기 전에.(야행」 32)

 

어쨌든 죽으면나는 틀림없이 유도 씨한테 붙을 거다난 죽어서도 쓸쓸할 테니까유도 씨가 반드시 붙여줘야 돼././일부는 진심이었지만총체적으론 농담이었고농담으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며 한 말이었는데뜻밖에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왔다붙어하고 유도 씨가 말했다./얼마든지 붙어.(대니 드비토」 42)

 

야행의 거부와 단절의 대화가 대니 드비토의 연인 사이의 대화와 대조를 이룬다면야행」 속 또 다른 장면에서 얼핏 엿보이는 노동의 이미지는 양산 펴기」 속 그것과 대조를 이룬다야행에서 노동(“아침에 방수를 하러 가야 합니다.”)은 어차피 각자 살아가는 일에 불과하다그러나 양산 펴기에서 자원 봉사가 아닌 아르바이트임이 명시되는 의 하루치 노동은 다투고 속이 상해버린 연인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한 화해와 위로의 몸짓이다.

 

더구나 우린 아침에 방수를 하러 가야 합니다형님저는 형님과 형수님에 대해서 좋은 기억을 간직해왔고앞으로도 그런 기억만 간직하고 싶습니다언제까지나 말입니다그러니 이만 돌아가주세요. (...) 이러지 못할 것도 없는 거예요어차피 각자 살아가는 일 아닙니까.(야행」 31)

 

내 눈엔 그게 무척 아름다워 보였고 그 아름다운 것이 내게 무척 필요했다. (...) 그런데 장어라./장어와 지구본을 비교하면 아까웠다장어는 한 끼로 순식간에 사라지지만 지구본은 남는다.(양산 펴기」 134)

 

누가 또 문을 두드리기 전에” “불을 끄라는 세계와 죽어서도 쓸쓸할” 거라는 연인에게 얼마든지 붙으라고 약속하는 세계는 얼마나 먼가밤길을 찾아온 형님 내외를 쫓는 구실이 되는 백씨 부부의 노동과 순식간에 사라지는 장어를 연인에게 사 먹이기 위한 의 노동은 어떻게 다른가.

장어보다 지구본(곧 아름다운 것” 134)을 갖고 싶던 는 사랑하는 이에게 장어를 먹이기 위한 노동(“로베르따 어쩌고 이태리 메이커에 제조는 중국입니다.” 153)이 지구본보다 아름답다는(“아아 그거./노래,라고 잠결에 대답했다.” 같은 면것을 알게 된다하루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잠꼬대를 노래라 칭하는 장면에서 노동은 달콤한 말보다 진실한 사랑 고백과 다름없다우리 중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것은 무척 필요하지만무엇이 무척 아름다운지는 다시 우리에게 달렸다.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살 수 있었고 갈 수 있었다. (...) 그에 관한 꿈으로 완전에 가까워지고 있었으므로 그는 갈 수 있었고살 수 있었다.(뼈 도둑」 204-205)

 

역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디디의 우산), 도시의 경계 너머로(뼈 도둑), 심지어 육신의 바깥으로(대니 드비토밀려나는 애처로운 이들에게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무정한 세계에 유일한 피난처다뼈 도둑에서 의 사랑은 재난 속에서도살 수 있는 것을 의심하지 않게 하는 동력이며디디의 우산에서 도도와의 재회는 디디가 어린 시절 진 마음의 빚(바로 우산”,그것은 가난이기도 하다)을 갚고비오는 밤 곤히 잠든 친구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그들이 다음날 아침에 쓸 우산을 헤아려보는 마음이 발생, “최초의 정서가 시작된 지점”(파씨의 입문」 227)이다.

 

새벽의 잡역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파씨를 발견한 파씨의 아버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파씨를 바라봅니다그들은 거리를 두고 서서 입김을 뿜으며 서로의 빨간 얼굴을 바라봅니다./아버지파씨가 먼저 말합니다./타요내 뒤에 타요.(파씨의 입문」 225-226)

 

야행의 박대와 대비되는 나머지 단편 속의 환대가능한 사랑의 가장 작은 단위로부터 비롯한다그렇다면 이 소설집을 바로 겨자씨만 한” 사랑사랑의 발생”, “조그만” 사랑의 시작으로 읽어도 좋지 않을까(파씨의 입문」 같은 면). 둘만의 사적인 공동체들이 빚어내는 이 작은 온기가 각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