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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 연재마당/땡땡 서평단

[서평모임-3월의 주제 '한국소설'] 공선옥, 《꽃 같은 시절》

할머니들이 시야

공선옥, <꽃 같은 시절>을 읽고


양똘

 



실은읽으려던 책이 따로 있었다좋아하던 남성 소설가가 쓴 재기 넘치는 제목의 소설집이었다그런데 한 문장한 문장읽어 넘기는 일이 곤욕이었고한 편을 겨우 읽어냈을 때는 불쾌함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작가가 여성 인물을 그려내는 시선에 욕지기가 났다.이 작가가 변한 것이 아닐 터였다근 몇 년간 변한 것은 나다서평 쓰기로 한 기한은 며칠 안 남았고급히 책장을 훑었는데 이 소설이 눈에 띄었다공선옥의 <꽃 같은 시절>. 할매들이 마을을 지키는 투쟁을 다루고 있다는 것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출간 당시에 주변 사람들 입에 꽤 오르내렸던 것 같은데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과거의 나에게는 그다지 의미 있는 얘기가 아니었다할매들의 투쟁이라는 것도여성의 이야기라는 것도그놈의 꽃이라는 것시절이라는 것도.

 


귀신

이야기는 에서 시작된다서울에 자식들 보내고 집에서 혼자 살던 할매가 죽고그런데 빈집을 못 떠나 귀신으로 머문다작가는 집을 마치 생명체처럼 묘사한다. ‘과학적으로 생각하면 사람 기척이 없다고 해서 무생물에 불과한 집이 영향받을 까닭이 없다그런데 우리는 경험적으로충분히 그렇게 된다는 걸 알고 있다빈집은 적적해서 제 을 떨어대고그러다 못 견디고 스러진다할매는,할매였던 귀신은 그걸 잘 알아서 차마 못 떠난다반귀신이 다 된 옆집의 백 살 할매도 그걸 알아서 남의 빈집에 들러보곤 한다.

 


꽃 때문이다

그런데 그 빈집에 외지 부부인 영희와 철수가 와서 깃든다그들은 혹시나 싸게어쩌면 공으로 살 빈집을 찾던 중이었다귀신이 있는 줄도 모르고영희가 그 집에 홀린 듯 들어온 것은 마당 귀퉁이에 핀 복사꽃 때문이었다그런 인연으로 영희는 엄마뻘인 그 동네 할매들과 함께 마을 돌공장’ 반대 투쟁에 뛰어들게 된다안 그래도 먹고살기가 힘든데자기 고향도 아닌 타지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대책위원장이 된다이 모든 게 다그놈의 꽃 때문이었다사실 영희네는 도시 철거촌에서 쫓겨나온 사람들이고공교롭게도 이 빈집의 원래 주인(죽은 할매의 큰아들또한 서울 용산의 철거민으로 날마다 남일당에 가서 명복을 빌고 오는 사람이다그랬으니 결국 또 운명처럼 터전에 대한 투쟁으로 엮이게 된 것 아닌가싶겠지만아니다꽃 때문이라니까.

 


소리가 있는 것들거미와 참새와 벌그리고 지렁이

마을에서 아주 젊은 축에 속하는 영희는공장 직원들과 형사라는 사람이 칠팔십 할매들한테 빈정거리고 막 대하는 꼴이 속 터져서 얼결에 대책위원장 자리를 맡지만생각할수록 앞이 깜깜하고 눈물만 나온다그렇게 망연자실할 때귀신이 머무는 집에서 그녀는 어떤 소리들을 듣는다천장에서 줄을 타고 내려와 눈앞에서 춤을 추는 거미의 소리지붕 밑에서 장난하는 참새들 소리뒤안 쪽 뙤창으로 날아 들어온 벌의 소리... 대롱대롱대롱뽀시락뽀시락뽀시락곤지곤지곤지... 어둑한 방 안에서 그 소리들에 둘러싸여 영희는 큰 위로를 받는다집도 몸을 떨며 소리를 내는데거미니 참새니 벌이니 하는 작은 것들은 오죽하겠는가.

이 소설에서 소리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미지다세상에 소리 없는 것이 있을까이때 소리는 곧 생명이면서존재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전혀 소리가 없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밟히면 꿈틀하는 것의 비유로나 쓰이는 지렁이조차도 분명한 울음소리가 있다고 소설은 말한다들으려고들 안 하지만 소리 있는 것이 또 있다여성이다.

 

우리는 적막한 속에서 소리 없는 것들의 온갖 소리를 들었다. (...) 꼭 우리들 같아서우리도 소리를 안 내고 살 뿐이지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닌데도 세상은 땅 파먹고 사는 아낙들은 소리가 아예 없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 그래도 우리는 울지 않았다. (...)무엇보다 우리가 울면닝꽁닝꽁닝꽁지꾸지꾸지지잉띠룽띠룽띠루룽하는 것들이 우리 울음에 묻힐까봐 울지 않았다.”

 


여성들역사

소설에서 마을 여성들의 연대는 정말로 끈끈하다귀신이 되어서도 추억하게 되는정말이지 귀신같은 일체감이다그녀들이 지렁이처럼 밟혀온 역사가 있기 때문에그러나 언제나 꿈틀대지 않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그녀들을 억압하는 것은 비단 현재의 돌공장’ 자본과 경찰법체계 등 높으신 분들만이 아니다그 훨씬 이전부터숨 쉬듯 억압당해온 역사가 있었다바로 그녀의 남편들더 정확히 말하면 가부장제의 소행이다.

새마을운동 한답시고 동네 남자들이 마을 당산나무를 베어내려고 할 때 그녀들은 나무를 몸으로 막아냈다이 남편이라는 작자들은 단지 군에서 나오는 시멘트와 모래를 쓰기 위해 멀쩡한 돌담을 허물고 블록 담을 쌓고심지어 그 기념으로 애먼 개를 잡아 잔치를 벌인다이제 막 굳기 시작한 시멘트 담을 부수고 욕설을 들으며 다시 돌을 쌓는 그녀들은그 돌들만큼이나 정답고 단단하게 쌓여온 존재다언제든 저항이 필요할 때 머리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고그 울분과 한을 놀이나 노래로 풀 줄도 알았다.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송홧가루 노랗게 달리던 그 봄에 우리는 군서기 몰래면서기 몰래순경 몰래 담근 술을 이고 지고 화전놀이를 갔었다한강쟁이댁시앙골댁살푸쟁이댁밤실댁오류골댁해징이댁용수막댁무수굴댁이 장구 둘러메고 솥뚜껑 거꾸로 들고 산에 올라갔다우리는 이쁜 치마저고리 입고 산에 올라 술을 먹고 꽃전을 지져먹고 장구를 치고 놀았다새끼들이 울건 말건서방들이야 굶건 말건시부모들이야 눈을 흘기건 말건 우리가 그만 놀고 싶을 때까지 지치도록 놀았다.”

 


(), 쓰지 않음으로 쓰기

이 할매들의 (귀신까지 포함한오래된 우애는 현재 투쟁에서 다시 재현되는데대책위원장 영희와 예비 소설가 해정의 우정이 그것이다해정은 자연에서 치유받는 인간이라는 소재로 출판사와 장편 계약을 해서 이미 계약금까지 받아놓은(이미 써버린상황이다.그러니까 그저 밀린 원고를 쓰기 위해 조용한 시골 작업실을 마련했을 뿐인데 투쟁에 엮여버리게 되는 셈이다그녀보다 한발 먼저 엮여버린 영희, ‘우리 할매들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울먹이는 영희에게 속절없이 끌려버렸기 때문이다이제 해정도 더 이상 자연에서 치유받는다는 식의 속편한 힐링 스토리를 쓸 수는 없게 되었다사람은 곧 죽어도 자기 사는 것만큼을 쓸 수 있을 뿐이다그래서 때로는 쓰지 않는 것이 더 쓰는 것에 가까운 상황마저도 온다.

해정뿐만 아니라 영희도 꽃 때문에 눌러앉은 사람답게 영락없는 시인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할머니들이 좋아.”

여기 안 떠날 거야?”

할머니들이 좋아서.”

요새 시는 안 쓰냐?”

할머니들이 시야.”

 

 

그리하여 꽃 같은 시절

할머니들이 시라니이런 오글거리는 대사를 비웃을 수 있다면 좋겠다물론 나는 그럴 수 없다오히려 나도 그 말을 흉내내야 될 형편이다할매들이 소설이라고투쟁하는 할매들 이야기를아니면 할매들을 닮은 이야기를집인지 귀신인지 그도 아니면 지렁이인지 구분이 안 되는 이야기를 꼭 쓰고 싶은데내가 과연 그걸 쓸 수 있는지그게 지금인지아니면 아주 나중일지 모르겠다어찌됐든 나는 이토록 뻔한 여성적’ 상징으로 가득 찬따뜻한 감성이 절절 흐르는 소설을 전처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무시하기는커녕 울지 않고 읽을 수가 없게 되었다밀양 할매들청도 삼평리 할매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할매들을 알기 전과 후의 인생이 나에게는 같은 것이 아니다그 경계가 된 최근 2년간이 나에게는 꽃 같은 시절인 것 같다결코 편안하지 않았음에도그렇게 말할 수 있다.꽃이 힘을 발휘하는 건 다른 누구보다 울고 있는’ 사람 앞에서이기 때문이다.

 

내가 얏닐곱살 때 울 오무니가 애기를 낳다가 돌아가싰거등할머이가 방문을 탁 열고 나옴서아이느그 어매 죽어부렀다허등만죽는 것이 뭣인지는 몰라도 어쩐지 슬프제이막연허게 슬픈게 말레에 우두근히 앉아서 다무락 옆에 모란꽃 벙그러진 것만 가만히 보고 앉았어모란꽃이 하도 이뻐서 그것 보니라고 내가 어매 죽은 것을 깜빡 잊어묵었어그러니그때 모란꽃같이 이삔 것이 한 태기도 없었으면 얼매나 더 설워이그렁게 자네도 맘이 힘들수록에 한사코 모란꽃맹이로 이삔 것만 생각허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