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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땡책 주요활동/행동독서회와 연대의 현장

제10회 서울와우북페스티벌 밀양기록프로젝트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싸움, 밀양

 -장미경


출판사 직원인 내게 도서전이란 휴일 노동과 다름 아니다. 특히나 한국의 도서전이란 것은 출판사들의 박리다매 식 도서 판매 위주로 행사가 기획되는 터라, 그 행사 안에서 즐길 것이 더러 있다고 하더라도 그해 신간을 낸 저자들을 만나는 것 이상의 기획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나 역시도 책을 싸게산다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가져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 올해에는, 서울와우북페스티벌에서 밀양을 살다 사진전과 더불어 밀양의 최전선에서 사건을 또 사람을 기록해 왔던 기록예술가(또는 기록노동자) 세 분과 각각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이 마련된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약간의 의아함과 함께, 또 약간의 반가움과 함께 지난 103일 저녁, 마지막 시간으로 마련되었던 김일란 감독과의 대화 자리에 기쁘게 참여할 수 있었다.

 

기록예술가들의 사람책을 빌려 읽는다는 컨셉으로 프로그램이 진행된 서교예술실험센터 지하 갤러리에는, 인권재단 사람과 류가헌 갤러리 등 곳곳에서 전시되었던 밀양의 사진들과 각종 상징물들이 소박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주민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담겨 있던 조형물, 공권력의 광기를 품은 사진들, 주민들이 직접 쓴 현수막과 천자보 등... 밀양에서 벌어졌던 국가 폭력과 무자비한 인권 침해의 현장에서 카메라를, 펜을, 붓을 들었던 사람들 공동의 목소리가 거기 있었고, 외마디로 울부짖던 주민들의 얼굴들이 함께 있었다. 아주 최소한의 것들이었지만, 그 작은 공간이 밀양을 기억하려 애쓰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가 무척 반가웠다.

 


먼저, 김일란 감독이 준비해 온 두 개의 영상을 보았는데 첫 번째 영상은 밀양인권침해보고서를 영상으로 만든 것이었다. 송전탑 건설 반대 현장에서 주민들이 어떤 폭력적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만 따로 모은, 그전까지 봐 왔던 것들보다 훨씬 심한 상황을 담아낸 처절한 기록이었다. 올해 611, 밀양 행정대집행이 시작되던 날 사람이 안에 있는데도 움막 밖에서 무리하게 커터칼을 사용하거나 살갗에 묶은 쇠사슬을 향해 목과 옆구리 어디든 가리지 않고 절단기를 들이대며 인권을 짓밟았고 경찰은 변호사들, 인권감시단의 감시 활동을 보장하기는커녕 제압하고 차단하며 폭력을 방기하고 주도했다. 여경들이 팔을 놓지 않아 뼈가 부러진 수녀님, 내 집에 강도 들었다고, 다 죽이라고 통곡하는 주민들. 다시 한 번 참담했다. 자랑스럽게 업무를 마친 것처럼 웃으며 사진을 찍는 여경들, 신문기자로 위장하거나 할매들에게 욕을 하며 조롱하는 경찰들의 웃음. 그들의 동기나 마음가짐을 인간의 속성으로 이해하려하는 일이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밀양 송전탑 611 행정대집행 인권침해보고서 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YeJ1LxaWbA0

 

밀양 행정대집행은 세월호 참사로 인한 전 국민적 애도가 옅어질 즈음인 6월에 갑자기 진행되었다. 김일란 감독은 송전탑 부지 네 곳에서 경찰에 의해 마치 전쟁터에서 땅따먹기 하는 것처럼하루 만에 모두 끝이 났다고 표현했다. 이 영상은 모두 단 하루 만에 일어난 전쟁을 기록한 것이다.

 

두 번째 영상은 밀양구술프로젝트 팀에서 <밀양을 살다> 책 작업을 시작할 무렵, 영상기록단에서도 주민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남기자고 해서 시작했던 작업이었다고 했다.

http://www.youtube.com/watch?v=tmostGBygbg

삶이 구호가 되는 순간, 많은 것들이 증발된다. 물론 다큐로 만든다고 해서 그것들이 잘 정리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구호로 얘기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조금이나마 정리하고 기록하고 그분들의 삶을 되새기기 위해 옴니버스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이 영상은 그 영화의 트레일러다. 다행인 건, 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마침 할머니들이 자신들의 감정을 말하고 싶었던 때였던 것 같았다는 점이다. 덕분에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깊은 관계를 맺고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공간에 있는 책과 영상과 사진 기록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고, 모두가 현장에 같이 있었다.”(김일란)

 


곧이어 둥글게 모여앉아 좀 더 가까운 형태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다음은 함께 참여한 사람들과의 대화를 요약하며 정리한 것이다.

 

-저는 127번에서 행정대집행 현장을 기록했던 사람이고 다큐를 만들고 있다. 행정대집행 전에 기록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밀양에 가게 되었다. 다큐를 만드는 사람이긴 하지만 기록이 아니어도 어떻게 연대를 할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하게 된다. 밀양도 협동조합 형태로 전환이 된다고 하는데 내 방식으로 어떻게 연대를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이 된다.

 

김일란: 세월호 미디어팀 활동을 하면서 어제도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 같다. 그리고 사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잘 알고 있는 건 본인인 것 같다. 잘 들여다보면 그 일들이 내 삶과 연결된 지점이 있는데, 그 연결점을 찾아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실천인 것이다. 한국사회의 다양한 일들이 나와 어떻게 만나는지 고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실천이 아닐까. 밀양에서 주로 집회를 했을 때 우리가 밀양이다라는 구호를 많이 썼는데, 구호의 그 빈 구멍을 채우는 것이 시작이 아닐까 한다. 혹자들은 노년의 삶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갖는 것이, 전기를 아껴 쓰는 것이, 할매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자신의 할머니와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도 실천이라고 얘기하는 분들이 있다. 그들과 어떻게 만날지 고민하고 상상하는 것, 그것이 중요할 것 같다.

 

-영화 <밀양, 반가운 손님>이라는 작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김일란: 밀양을 어떻게 봐야할까. 한국사회에 모순과 갈등과 폭력의 현장이 많지만 밀양이 내게 독특함을 준 것이 있었다. 자신의 삶에서 고통을 만나는 순간, 그 고통을 이해하고 싶어지는데 이해하고 이해하다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지 않나. 왜 내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하는. 할매들을 만났을 때는 과정 자체가 그런 부분이 너무 많았다. 송전탑 전부터 그분들의 삶에 불행과 모순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이분들이 갖고 있는 감정에 조금이나마 언어가 있었으면 좋겠고 도움이 됐으면, 또 이것들을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와 소통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컨버팅)되면 좋겠다고, 구술프로젝트를 책으로 엮는 과정에서도 글로 표현되지 못하는 것들을 영상으로 담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함께 활동하던 작가들을 꼬여내어 제가 피디를 하게 되었다. 이 영화에서 제가 했던 일은 네 명의 각 감독이 포착하고 만들어낸 것들을 옴니버스로 잘 엮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방식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할머니들의 언어를 컨버팅한다는 것은 책도 그렇고 영화도, 사진도 다 공유하고 있었던 것 같다.

 

-송전탑 이전에도 불행과 모순이 많았다는 말씀은 인터뷰를 통해 충분히 느끼셨던 부분인가.

 

김일란: 물론이다. 인터뷰를 하며 할매들의 세계사를 듣다 보니, 송전탑은 이분들 삶의 어떤 변곡점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투쟁할 때 변화하는 것이 실로 놀라웠다. 말해 할매 같은 경우는 80대인데, 일제 시대 때 결혼을 하고 글도 배우지 못했고 남편은 보도연맹 때 죽고 아들은 베트남전 참전 후 장애를 입는 등 그렇게 살아온 과정에서 송전탑 투쟁을 하게 된 경우였다. 그분들은, 이렇게 여러 굴곡마다 쭉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최대한의 저항이었다. 삶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이를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생업인 농사를 포기하는 것도 아닌, 할 수 있는 것을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채 살다가 끝끝내 송전탑을 만났을 때 이것 역시 받아들이려 했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느낌이 들게 된 것이다. 보수적인 지역 정서가 있는 곳에서 어지간하면 국책사업이라 수용하려 했지만, 이건 틀린 거다 싸워야 하는 거다라는 지점까지 발상의 전환이 일어나게 된 것이 바로 삶을 지켜 온 힘인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두렵고 불안하던 시점에 연대하는 사람들이 한둘씩 찾아오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 사람들이 싸워도 되는 거다, 틀린 게 아니다라는 말을 해주면서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주민들은 그 한 분 한 분의 생애가 정말 놀라운 분들이었다.

재밌었던 것은, 행정대집행 전에 갔을 때 할매들이 자신의 삶을 설명하기 위한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연대자들이 쓰는 언어를 기억해서 자본주의, 가부장제, 국가폭력 같은 말을 하면 알아듣는다는 걸 아시고 쓰셨던 것 같다.

 

얼마 전에 강정평화대행진을 가서 쭉 걷고 마지막 날 강정에 갔는데, 주민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저 집은 미군기지 건설을 찬성하는 집이니 반대하는 집에서 밥을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더라. 저 집이 미군기지를 찬성하는 이유는 해군기지가 건설이 되면 해군들이 몇 개월씩 바다를 떠돌다가 선박했을 때 엄청난 소비를 기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는데 문득 , 여기가 기지촌이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영상을 시작하고 연분홍치마가 처음 사회적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 기지촌의 인권 실태조사였다. 제 머릿속에 기지촌은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논밭이었던 곳에 미군기지가 들어서고 선량했던 농민들이 미군들을 상대로 장사를 시작하면서 농사를 그만두게 된 마을을 기지촌이라고 부른다는 일련의 과정이 항상 있었다. 60~70년대 미군들이 늘어나면서 박정희가 미군을 붙잡아두기 위한 장치의 일환으로 성매매를 활성화시켰는데 군산 같은 경우는 군산아메리칸타운이라고 하는 주식회사를 통해, 허허벌판에 놓인 타운 안에서 성매매만 하는 곳도 있다. 그래서 기지촌 하면 저에겐 그런 이미지가 있다. 요즘에는 기지촌에 대한 것을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낡은 것이고 역사 속에 사라져가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올해 강정에 가니까 기지촌이 여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해군기지가 건설되고 미군기지가 들어서면 미군을 상대로 장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날 테고, 그렇게 상상을 하다 보면 5년 안에, 10년 안에 강정은 기지촌이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느낌이 확 달라졌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고 생각했던 문제들이 환기가 되면서, 오히려 강정은 이제부터가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예쁜 마을인데 이 마을의 변화를 기록하고 주민들이 누가 떠나고 누가 들어오고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어떻게 지형이 변하는지를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강정의 해군기지 반대 투쟁이라고 했던 부분은 지금, 바로 지금이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이었고 사실 그와 비슷한 생각이 밀양에서도 있었던 거다.

밀양 투쟁은 거의 10년 가까이 진행되고 있다. 상황은 점점 고립되고 송전탑은 점점 들어서고 하던 즈음에 연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가게 되었는데, 그때 제가 느꼈던 감정은 강정과 비슷했다. 이게 끝났다고 생각할 때 다시 시작이구나. 할매들의 남은 인생을 걸고 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기록되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매들이 송전탑을 머리에 이고 산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그걸 상상할 때마다 정말 희한한 느낌이 든다. 그만큼 송전탑은 이미 이분들의 머릿속에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거다. 이게 단순히 국가폭력이나 좌절이나 상처의 역사뿐만은 아니고, 송전탑에도 다른 면이 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했던 것의 즐거움, 사진에도 나오지만 농성장에 모여서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살아 온 얘기도 했던 그 추억이 송전탑에 같이 있는 거다. 송전탑을 머리에 이고 산다는 것은 송전탑이 가져다 준 국가폭력의 아픈 상처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느꼈던 표현할 수 없는 충만함 역시도 같은 의미였던 것이다. 이 두 가지 감정을 같이 느끼고 있는 할매들의 마음을 기록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주류 언론에서, 또는 투쟁의 어떤 목표라고 했던 그것이 끝났다고 했던 그 시점이야말로 정말 다시 시작되어야 하는 지점이 아닐까 하는 게 용산도 밀양도 강정도 세월호도 비슷한 느낌이 저한테는 좀 있는 것 같다.

 

-현장에서 영상 작업을 하시면서 직업인으로서 고통을 많이 느끼셨을 텐데, 그럼에도 직업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김일란: 저는 카메라를 배운 적이 없고 현장에서 필요하다 보니 작업을 하게 됐는데 어느 순간엔 잠을 못 자기도 했었다. 나중에 굶게 되면 어떡하지, 나만 혼자 남으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함을 늘 갖고 살았던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불안함을 스스로 관리할 정도의 경력 등이 생기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가장 많이 늘어나고 단련된 게 있는 것 같다. 바로 맷집이 좋아진 거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안 아픈 건 아닌데 맷집이 좋아진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는 어떤 분이 고통스러운 마음에 눈물을 흘릴 때 못 찍겠어서 카메라를 내린 적이 굉장히 많았고 심지어 방송기자들의 행태와 비교하며 우월감을 느꼈던 적도 있는 것 같았다. 근데 지금은 안 찍는 것 자체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찍은 이후에 그 이미지를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느냐가 더 윤리적인 태도를 요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렇게 생각이 바뀌어 가는 것이 맷집이 좋아졌다고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다. 나중에 이분들의 고통을 잘 전달하는 것도 기록하는 사람들의 몫이 될 텐데 잘 기록해서 잘 전달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맷집이 세진 거라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는 거다.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길게 보게 되는 것도 있고, 만남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교감하는 과정에서 상처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다시 의미화 할 수 있을 만큼의 맷집이 생겼다는 거다. 근데 활동가든 누구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사실 내 감정이 아니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에게 계속 교감하고 있어서 느끼는 거다. 밀양 같은 경우도 할매랑 친해지면 그 할매가 느낄 고통이 어떨지를 상상하면 고통스러운 거고, 그 감정이 내 것이 되면서 마음이 아픈 건데 이런 과정은 결코 일상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는 기록하는 사람들이 무당 같다는 얘기도 한다. 그 사람과 접속해 있을 때는 최선을 다하지만 사실은 내 감정이 아니고, 그것을 착각하지 않는 것도 맷집이 세진 거라고 생각한다. 내 감정에 내가 빠져서 기록을 못 한다던가 상황에 흔들린다던가 하는 것이 좀 줄어들었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비해 어쩌면 무당에 가까운 감정들이 있는 것 같다. 저도 저의 일상에서의 경험이 있기에 그 일상의 감정과 현장에서의 감정 모두 내 감정이 맞지만, 그 감정들을 구분하거나 다르게 소화하려고 하는, 강을 건너듯 감정을 관리하는 나름의 방식이 좀 생겼다.

 

-어쩌면 감독이라기보다는 타인의 삶을, 고통을 기록하는 사람으로서의 관점에서 갈등의 현장들을 다니셨는데. 세월호도 마찬가지고 한스러운 얘기를 말할 기회가 우리사회에 없지 않나 싶다. 이런 문제에 대한 제언을 해주실 수 있다면.

 

김일란: 제가 좋아하는 설화가 있는데, 장화홍련전의 전신이기도 하고 밀양 설화이기도 한 <아랑전>이다. 새로 부임한 사또에게 아랑이 원했던 것은 딱 세 가지였다.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그리고 명예 회복이었다. 이 설화가 나온 게 얼추 300년 전인데 그 세 가지 테마가 지금까지도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건, 억울함을 호소하는 과정에서 혼령이 모든 것을 다 얘기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까지도 해법과 수사 방향까지 다 알려줬다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많은 설화들을 보면 원혼들이 다 알려주고 이 세 가지를 요구한다. 지금 세월호 문제도 딱 이렇다. 세월호 특별법을 통해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고, 국회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유가족들이 다 알려주는데 관리들은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꼴인 거다. 세월호 유가족이 말하는 진상 규명은 실체적 사실 관계를 밝힌다기보다는, 내가 왜 이런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원인을 알고 싶은 거다. 청운동에서 저녁때마다 유가족들끼리 각자 궁금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프로그램이 진행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온 얘기들은 대단하고 큰 것들이 아니라, 15일 밤에 그렇게 안개가 짙게 끼었는데 왜 출발했는지가 궁금하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거다. 어떻게 보면 안개가 짙어도 출발은 하는데, 사실 그 마음을 잘 들여다보면 그때 출발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마음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그 생각을 계속 하시기 때문인 거다. 유가족들에게 진상 규명이란 이분들의 고통과 상황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계기를 찾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밀양 할매들도 가면 항상 고맙다고 한다. 그 마음은 내가 옳다고 얘기해줘서 고맙다 내가 여기서 화를 내는 게 맞다고 얘기해줘서 고맙다는 마음인 것 같았다. 이 세 가지는 언제나 비극적 사건에 따라 붙는 테마인 것 같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상 규명이다. 당신들이 그렇게 분노하고 화병에 걸릴 정도로 화를 내는 게 맞다는 것이 모두에게 인정되는 것이 진상 규명인데, 사실 한국사회에서 제대로 진상 규명이 된 적이 별로 없다. 응어리를 풀어가는 과정에 시스템이 갖춰지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기 때문인데, 국가가 책임져야 할 문제다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사후 명예회복이 안 되고 있고 책임자를 처벌한다 하더라도 명예회복이 안 되고 있기 때문에 비극에 대한 해결이 완결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완결되는 과정을 한국사회가 그다지 해 본 적이 없는 거다. 그 과정 하나가 사회적 경험으로 남는 것이 잊혀지지 않는 것이고 가치관이 바뀌어가는 것 자체가 남는 거다. 용산도 그렇고 세월호도 그렇고 사건 자체가 기억되는 것보다는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제대로 된 과정으로 우리에게 남는 것이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이걸 잘 기억하려면 진상 규명이 제대로 되어야 하고 그래야 사건 개요도 제대로 남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가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책임질 것인지, 대통령은 수장으로서 국민을 향해 무엇을 약속하고 책임져야 하는지, 국민 모두가 요구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한 감각이 생기는 거다.

진상 규명이라고 하는 것, 그 과정의 체계를 밝고 나가는 것이 억울한 사람이 덜 생기거나 당사자의 억울함이 줄어드는, 또 이 비극으로 인한 불행이 파생되는 것을 막는 것으로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건 밀양도 마찬가지다.

 

-어떤 마음 가짐으로 작업을 하고 활동을 하시는지.

 

김일란: 그런 생각은 한다. 관객들은 절대로 내가 만만하게 볼 사람들이 아니다. 다만 이 사안에 대해 나보다 정보가 적을 뿐이지 어떠한 관점도, 삶의 태도도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항상 한다. 먹고 사는 게 바쁜 것은 맞는데 나는 조금 다르게 바쁘다. 다른 분들은 저와는 다른 선택을 하셨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 나보다 더 뛰어난 태도로 일상에서 치열하게 사는 분들이 기회가 적어서 이 얘기를 못 들을 뿐이지 어떠한 부분에선 나보다 뛰어난 분들이기 때문에 그분들을 속이듯 영화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늘 한다. 다큐는 늘 엄중한 작업이고, 죄책감을 요구한다든지 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려고 무지하게 노력한다. 이 영상을 보는 사람들은 정말 놀라운 사람들인 거다. 어떤 면에서 일상의 무게와 일상의 투쟁은 다른 분들이 저보다 훨씬 더 치열하다고 생각한다. 늘 대화하려는 자세로 작업을 하고 활동을 하려 한다.

 

 

김일란 감독과 나눈 이야기를 들으며, 일상에서 이런 기록이 자주 시도되고 자주 만나져야 한다는 분명한 생각이 들었다. 우연한 기회로 옴니버스 영화 <밀양, 반가운 손님>을 주민 분들 몇 분과 함께 서울에서 본 적이 있었다. 행정대집행 영상부터 말해 할매 이야기,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인 문기주 정비지회장이 주연 배우(!)로 출연하는 극영화와 주민들의 한풀이를 담은 서글픈 춤 한 판까지 보면서 많이 울고 웃었다. 할매들의 지혜로움이, 모든 주민들의 싸움이, 그 살아 있는 날것의 언어들이 참 좋았었다. 나는 항상 감정으로 밀양을 만나기에 빨리 식고 자주 잊어버린다. 그래서인지 이런 일상의 자리들이 더 자주 마련되면 좋겠고 더 자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밀양, 반가운 손님>은 개봉이 불투명한 상황이지만 공동체 상영을 통해서는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땡땡책협동조합에서도 그 기록을 함께 만날 수 있는 날이 있기를. 그 시간은 분명 이날처럼 소중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