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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땡의 일상/땡땡이 인터뷰

김신양 조합원: ‘서로의 삶을 지켜주는 운명공동체’인 땡땡책을 원해요

칼바람에 뺨 맞는 날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모두 안녕들 하신가요? 그러고 보니 작년 이맘때에는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물음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두드리고, 불씨를 일으키기도 했었네요. 1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안녕 못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라는 탄식 내지는 진지한 물음이 자꾸만 맴도는 연말입니다. 얼마 전 하승우 땡초의 길잡이 독서회 <살아남기에서 살아가기로>가 성황리에 마쳤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연말 송년회에서 그러한 성찰의 일부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문득 해봅니다.

이번 달에 제가 만나고 온 조합원은 김신양 님입니다.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을 아우르는 ‘결사체 운동’, ‘사회적경제’를 오랫동안 연구하신 선생님을 만나러 가면서 마음속에 품은 질문들이 한아름이었습니다. 미리 보내 주신 소개글에서 “협동조합과 노동조합의 양다리를 걸치는 독특한 인생을 살”았다는 부분을 보았을 때부터 퐁퐁 솟아나는 질문들을 주체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인터뷰는 소문으로만 접했던 ‘신양객잔’에서 진행되었는데요, 지역에서 공수해 온 나물로 지은 밥, 사무국 호철샘의 이모님께서 담그셨다는 김장 김치, 생협에서 보내 온 싱싱한 꼬막 한 박스, 직접 보글보글 끓여 주신 뜨뜻한 뱅쇼 한 잔, 술술 넘어가다가 결국은 눈물콧물 다 쏟게 한 막걸리 등 사연 많은 먹거리들을 먹으며 지금의 삶으로 오게 된 선생님의 사연을 듣고 왔습니다.

‘곁의 사람들을 믿고, 나누고, 그들의 삶(우리의 삶이기도 한)을 지켜 주기 위한 운동’으로서 협동조합의 상을 그려 보게 된 시간이었는데요. (유행가 가사처럼) 주기보다 받기만을 원했던 협동조합 초짜에게 뜨끔뜨끔한 순간들이 참 많았습니다. 많은 땡땡 분들에게도 ‘서로의 삶을 지켜준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 * *


 미리 보내 주신 자기 소개글을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김시습의 후손’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해 주신 부분이 있는데요. 그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부분이 있나요?

김시습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어요. 아버지가 강릉 김씨 문중 장손으로 어릴 때 족보를 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시곤 했는데, 사실 어릴 때는 별 호기심이 없었지요. 그저 촌에 자라며 도시를 동경하는 아이였거든요. 김시습의 영향을 의식하면서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죠.^^

저는 집안 사람들과는 달리 놀기 좋아하고, 남에게 뭔가 주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가족들은 저와는 정 반대죠. 흥도 기본적으로 없고요. 왜 나만 다를까 하는 물음이 늘 있었고,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의 뿌리를 찾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뿌리를 김시습에게서 찾았던 것이고요.

예전에 현장에서 조사연구를 할 때 협회장님이 “김신양은 선비 같다”라고 하셨어요. 평소 옳다고 믿는 것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스타일이고, 직언을 많이 하곤 해요. 나라 걱정도 많이 하는 편이죠. (웃음) 왜 김시습도 그런 생을 살았잖아요. 자기 뜻 굽히지 않고, 그로 인해 핍박받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게 되고. 김시습의 생에서 지금의 제 모습과 많이 겹쳐지는 것들을 봐요.


 ‘뿌리’라는 말을 들으니, 문득 선생님의 이름 뜻풀이가 궁금해졌어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거부하기도 하고(제가 그랬거든요^^), 그러다 어떤 계기를 통해 긍정하게 되기도 하는 것 같거든요. 어떤 뜻과 사연을 가진 이름인지, 그 의미가 선생님의 지향과 맞는지도 궁금합니다.

좋은 질문이에요. 저를 이해하려면, 제 이름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거든요. 제 이름은 믿을 신(信), 어질 양(良, 량)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믿음과 관대함이라는 의미의 조합이지요. 배우 ‘박신양’이 있기는 하지만, 신양이란 이름은 결코 흔하지 않은 이름이에요. 예전에는 친구들에게 놀림을 많이 받았어요. 당시에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을 ‘김양’, ‘이양’으로 불렀는데, 제 이름이 그런 식의 호칭을 환기시켰기 때문이죠. 초등학교 땐 별명이 춘향이었고…….

이런 제 이름을 사랑하게 된 건, 마르셀 모스를 만나면서부터였어요. 모스의 『증여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치가 뭔지 아세요? 바로 믿음과 관대함(관대하게 준다)이에요.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깜짝 놀랐지요. 모스를 좋아하고 연구하게 된 것이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프랑스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과 스승에게 제 이름의 뜻을 얘기하면 다들 ‘우와’ 하고 놀랐어요. 프랑스 이름에는 우리 이름처럼 어떤 의미가 들어 있지 않아 더 그랬는지도 몰라요. 그때 제 이름이 무척 자랑스러웠죠.

그것이 어찌 보면 내 인생을 사랑하게 된 계기였던 것 같아요. 마치 그전까지 숨겨 있던 생의 진실이 현시(顯示, manifestation)되는 그런 느낌이었지요. 방황하던 젊은 날들을 보내고 서른셋, 서른넷이 되어서, 그제야 운명의 방향이 정해지는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지금의 나를 만든 인생의 선배들, 스승에 대한 얘기를 종종 하시는 것 같았어요. 이분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가만 보면 사람들은 많이들 가족 중심으로 살아가잖아요. 특히 여성들은 결혼하게 되면 배우자와 자식을 중심으로 삶을 꾸리는 경우가 많죠. 가족에 대해서 무한 긍정하지는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가족을 ‘마지막 보루’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제겐 가족이 그다지 위로가 되거나 위안이 되지 못했기에 밖에서 그걸 찾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사람에게는 스승, 선배, 후배, 그리고 친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스승은 길을 보여 주는 사람이고, 선배는 그 길을 먼저 살아 주는 사람이라면, 친구는 함께 길을 걸으며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사람, 후배는 내가 간 길을 돌아보게 만드는 사람이지요. 저는 그러한 관계 안에서 살 때 ‘잘 사는 것’이란 생각을 해요. 이 네 존재는 가족의 빈자리를 채운다기보다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을 내주는 존재인 것 같아요.

저에게 스승은 마르셀 모스의 이론과 가치를 계승하는 알랭 까이에(Alain Caillé, 위키 정보) 선생인데요[김신양 선생님은 1994년에 프랑스로 건너가 리옹3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2002년에 다시 유학길에 올라 파리10대학 경제/조직/사회학과에서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을 공부하며 ‘다른경제’를 주제로 공부했습니다], 마거릿 대처가 “대안은 없다”라고 했을 때 학문적 전투의 일환으로 『모스』(MAUSS, Mouvement Anti-Utilitariste dans les Sciences Sociales)라는 저널을 창간하신 분이에요. 학문하는 사람 치고 자신의 학생들을 동지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데, 이 분은 학생들을 동지요, 길동무로 생각하는 분이셨죠. 학생들을 집에 초대해서 먹이고, 공부시키고 그런 분이었어요. 그분으로부터 삶, 행동, 글 등을 많이 배웠어요.

그분을 보며 처음으로 ‘스승’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분은 좌우로부터 많이 비난받았고,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좋은 자리를 알아봐 주지 않는다’며 불만을 많이 갖고 있었는데, 그런 비난들로부터 ‘스승을 지켜주고 싶다’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아요.

저는 애초에 학부에서 문학(불문) 전공을 했고, 프랑스 대학생들이 기본 교양으로 이미 갖추고 있는 법, 철학에 대한 상식들이 많지 않았어요. 토론할 때 못 알아들을 때가 정말 많았죠. 이해를 조금이라도 더 높이기 위해,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밥을 먹이고, 얘기를 들을 때가 많았어요. 스승의 집에 놀러갔을 때에도 앞장서서 요리하고 일을 배분하고 했는데, 스승님이 이런 제 모습을 많이 예뻐하셨던 것 같아요.

한번은 이런 적이 있었어요. 선생님께서는 방학 때 시골집이 있는 미네르부아(Minervois)로 학생들을 불러 모아 3박 4일간 집중 세미나를 하곤 하셨는데, 이틀 정도 제가 먼저 그곳에 도착하게 되었죠. 불편한 기색 없이 자신의 공간을 내어 주시고, 미리 장도 같이 보고, 수다도 떨고 정말 지겨울 틈이 없었어요. 스승님과 저는 24살 차이가 나는데, 그런 나이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상대를 편하게 해주시는 분이었어요. 많은 인연들이 시절을 거쳐 오면서 변질되기도 하지만, 알랭 까이에 스승님과의 인연은 제가 가진 커다란 자산 중 하나라고 느껴져요.

제가 ‘선배’라고 생각하는 이가 몇 분 계신데, 노대명 선배와 황덕순 선배라는 분이 참 많은 도움을 주었어요. 프랑스 유학을 다녀와서 어린 나이에 강의를 시작하고, ‘내가 연구자인가’하며 정체성에 혼란을 많이 겪을 때가 있었어요. 아는 신부님께서 “너는 현장성을 더 갖추어야 한다”는 조언을 주시기도 했는데, 당시 저는 현장에서 많은 회의를 느꼈기 때문에 그런 조언에 쉽게 마음이 동하지 않았어요. 이를테면 조사연구 현장에서 제가 책임자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는데, 어린 여성이라는 이유로 대우는 잘 못 받는다거나 하는 일들이 있었죠. 그러던 와중에 노대명 선배라는 분이 “너는 아이디어도 많고 독창성이 있으니, 너의 그러한 생각들을 잘 조직하면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러니 공부를 더 해라”는 조언을 주었어요. 평소 저와 기질이 다른 사람이고 참 무뚝뚝한 사람이었는데, 사실 저에 대해 많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였어요. 저의 앞길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었던 거고요. 어쩌면 자기와 달랐기에 저의 장점을 더 잘 볼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그 선배의 조언이 저에게 많은 자극이 되어, 당시 전셋집의 보증금을 빼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지요.


마르셀 모스와 만나면서 자신의 이름, 인생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김신양 조합원. '곁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 '관대하게 줌()'은 모스 이론의 핵심적 가치이다.


 첫 번째 유학을 다녀와 『프랑스의 실업자 운동』(책 링크)이란 책을 쓰면서 인생의 행로가 확 바뀌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실제 현장에서 보고 접하고 느꼈던, 역동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프랑스에 가서 직접 현장조사와 인터뷰를 했고, 1998년 가을에 책을 출판했습니다. 인터뷰를 하면서 실업자운동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실업자 조직’, 특히 실업자노동조합을 만드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에요. 당시 노동조합은 실업자들에게 “왜 노조가 있는데 실업자조직을 따로 만드냐”며 반대를 했어요. 실업자들의 요구사항(최저수당 수령 대상 및 연령 증가 등)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만의 요구(임금인상투쟁 등)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말이죠. 이미 70년대부터 실업자운동을 한 단체에서 발간한 자료집에 그런 말이 있더군요. “아무도 지금 내가 겪는 이 고통을 알지 못한다.” 아마 그때부터 전 사회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아무도, 심지어 노동운동조직도 거들떠보지 않는 버려진 노동자들에 대해서 말이에요.

아비샤이 마갤릿(Avishai Margalit)은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냐?’는 물음에 ‘제도가 사람을 모욕주지 않는 사회’라고 답하고 있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사실 복지와 자본주의 사회는 쌍둥이잖아요. 자본주의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복지가 반드시 필요한 거죠. 그런 복지가 사람들에게 비참과 모욕감을 주는 거예요. 빈곤의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게끔 말이에요. 그럼으로써 자본의 지배는 더욱 공고화되어 가죠. 이러한 패러다임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고민이 들었어요.

한국에서 현장지원 조사연구를 했을 때에도 유사한 감정이 들었을 때가 많았어요. 자활지원사업을 보면 생계급여를 받는 조건으로 자활사업에 참여하게 되어 있는데, 문제는 이 자활사업의 목표가 자활공동체라는 결사체를 만들어서 빈곤에서 탈피한다는 논리로 구성되어 있어요. 그런데 결사체는 자발적으로 참여해야 가능한 것이잖아요? 이처럼 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난감했죠. 그래서 이런 현장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라도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협동조합과 노동조합에 양다리를 걸친 독특한 인생 경험을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 양자가 서로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거나, 혹은 감정적으로 싫어하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하는데요. 양다리를 걸쳐 보신 입장에서 협동조합과 노동조합의 관계를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사실 협동조합과 노동조합은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사체 운동’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뿌리는 같아요. (요즘 협동조합도 노동조합도 ‘위기’라고 하는데) 뿌리가 같기에 저는 ‘위기’의 본질도 같다고 봐요. 우선, 둘 다 노동자를 버리는 운동이 되었기 때문에 어려움에 처했다고 봅니다.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버리고, 비정규직이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열악한 노동자들을 버리는 때가 많죠. 어느 때부터인가 노동조합에 있는 사람들 역시 자식은 강남에 있는 학교에 보내려고 하고, 주식 투자에 관심을 갖고, 신분 상승을 노리게 되었어요. 그런가 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생협 활동을 할 수 있나요? 중산층 위주라는 비판을 받는 부분이 있다고 봐요. 많은 생협들이 영양 공급 못 받는 사람들을 신경을 쓰지 않아요.

저는 운동의 승패, 성과보다 운동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깊이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운동하는 사람들이 점점 그걸 보려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고, 그로 인해 운동이 사람다움을 잃어 가는 것 같아요.

협동조합과 노동조합이 맞은 위기의 두 번째 원인은 바로 실무자들에게만 노동을 맡기고 조합원들은 결정만 하는 구조로 간 것에 있다고 봐요. ‘협동’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렸죠. 노동조합은 노자 간의 적대에 기반한 운동이고, 협동조합은 모두가 다 주인이 되는 운동이라는 기계적인 도식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양자 모두 전체 노동자, 관계, 사회를 보아야 하지, 협동조합은 사업체이고 노동조합은 투쟁체라는 시각, 그리고 노동운동과 협동조합의 연대라는 것을 ‘노동자도 직장을 벗어나면 생활인이니까 거기서 협동조합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연대를 이끌어내기에는 한계가 있어요.

실은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의 관계에 대해 글을 한 편 쓴 적이 있는데(링크), 그때 제가 내렸던 결론, 이상은 바로 ‘저항과 건설의 동시 구축’이었어요. 저항과 건설은 연결된 문제이지요. 건설해야 할 이상이 있다는 것은 저항하는 사람에게도 중요한 문제인 것 같아요. 마찬가지로 이 체제에 대한 비판과 저항 없이 대안을 넓히는 것도 가능하지 않지요.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같은 이상’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땡땡책의 경우, 협동조합들 내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알고 있는데요. 땡땡책에서 진행하면 좋을 만한 사업들, 제안하고 싶은 사업들 있는지 듣고 싶습니다.

제가 왜 불어 모임(이름하여 ‘요상한 교양독서모임’)을 시작했는지부터 얘기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우선 땡땡책은 저에게 많은 고민을 준 조직이에요. 친한 친구들과 동생들 모두 가입을 했고, 저는 독서는 별로 하고 싶지가 않았거든요. 연구자라는 직업상 책을 읽어야 하는 일이 많다 보니, 평소엔 하고 싶지가 않은 거죠. 그렇지만 조합원으로서 뭔가 해야 한다는 정신적 의무감은 컸어요. 할 건 없고 정말 오랜 시간 고민했어요.

우선 내가 “사람들과 같이 하고 싶은 것”이 활동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시간을 쪼개는 문제와는 또 다른데, 사람을 ‘어떻게’ 만날까라는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나도, 너도 원하는 것을 매개로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책 중심인 조합에서 불어 모임을 시작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어요. 독서모임 앞에 ‘요상한’이란 수식어를 붙인 건 이 때문이죠. 불어 모임을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이 왠지 없을 것 같았어요. 조직의 체제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스스로 검열을 안 하게끔 하는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무튼 불어를 매개로 모이기는 했지만, 불어와는 관계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져요. 날마다 먹을 것이 넘쳐나고, 사람들이 준비해 온 먹거리와 정성에 놀라곤 해요. 불어 실력을 늘리기 위해서만 모였다면 이렇게 하면 안 되겠죠. 하지만 아직까지는 모두들 이런 모임의 형태―2시간 공부하고, 2시간을 먹고 마시며 수다 떠는―에 만족해하고 있어요.

전에 제가 땡땡은 ‘사회의 난민들’이 모인 곳이라고 한 적이 있어요. 탄압받고, 억압받고, 그래서 서로 위로해 주고,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곳이죠. 이런 것도 꼭 필요한데, 그 방식과 관계망을 좀더 확장했으면 좋겠어요. 너무 끼리끼리가 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제안하고 싶은 건 첫째. 조합원 전체가 상호부조할 수 있는 계를 만들었으면 하는 건데, 이건 서로 만나 위로하고 지지하고 응원하는 것뿐 아니라 실제 생활고를 겪는 사람을 도와주기도 하고, 살림을 나누기도 하고 뭐 그런 걸 하는 겁니다. 두 번째는 일종의 대안적인 자조금융방식으로 ‘베짱이’클럽을 만들었으면 해요. 같은 지역에 사는 조합원 5~10명 정도 모임을 만들어 다달이 1~2만원씩 공동저축해서 모은 돈으로 조합원들 중 책방을 열거나 공동창업을 준비하는 이들, 또는 조합원이 아니더라도 지역사회에서 꼭 필요한 사회연대적인 기업을 만들려는 사람들의 베짱이가 되어 주는 겁니다. 땡땡책 같은 곳이 많아지면 좋잖아요.^^

협동조합은 내가 얻는 게 있어서 참여하는 게 아니라, 내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조직을 직접 내가 만들기 위해 참여하는 것이란 인식이 있어야 할 듯해요. 좋은 조합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조합원이 되는 연습이 필요하고, 아마 여러 계기를 통해 이루어져야 할 거예요. ‘서로의 삶을 지켜주는 운명공동체’로 땡땡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앞서 제안한 사업처럼 전 조합원이 참여할 수 있는 공통의 무엇을 만들어 가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희망, 절망... 이런 단어들을 쉽게 말하기가 어려운 세상인 것 같아요. 선생님에게 희망이 있다면 어떤 것이고, 절망은 어떤 것인가요?

요즘 이래저래 전반적으로 많이 슬픔을 느껴요. 그래도 유일한 희망이라면, 이 절망적인 세월을 내가 참 기특하게도 잘 버티고 있다는 거? (웃음) 제 연구, 강의의 주제인 ‘다른경제의 희망’처럼, 저는 죽기 직전까지 다른 세상에 대한 구상을 하며 살 것 같아요. 그 길을 함께 걸어갈 동무를 만나려 노력하고 있지요. 절망은 사람들이 좌절한 상태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것일 테지요.


 땡땡책의 ‘땡땡’에 어떤 단어를 채운다면 무얼로 채우고 싶으세요?

저는 ‘땡땡’에 무언가를 채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떤 것을 채워 갈지 자꾸 생각해야 하는 조직이면 좋겠어요(물론 이건 체제를 만드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계속 나에게 물음표를 주는 조직 말이죠. 그리고 그 물음이 불편한 물음이 아니라, 저에게 그러했듯이 건강한 물음이면 좋겠습니다.^^


"좋은 조합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조합원이 되는 연습이 필요하고, 아마 여러 계기를 통해 이루어져야 할 거예요." 김신양 조합원과 인터뷰를 하며, 새삼 '좋은 조합원이 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