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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 연재마당/땡땡 서평단

이 폐허를 응시하라(펜타그램, 2012)


『이 폐허를 응시하라』(레베카 솔닛 지음, 정해영 옮김, 펜타그램, 2012)

-진용주


지난 후쿠시마강연회 이후 땡땡의 소식을 받아보고 있다. 거기서 레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를 같이 읽자는 안내문을 보았다. 궁금증에 찾아보니 이렇게 한 줄 정리가 가능한 책이었다. “재난은 기존의 체제를 파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사회변화를 일구는 추동력이 될 수 있다.”

3년 전이었던가 4년 전이었던가,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을 읽으며 펑펑 울었던 적이 있다. 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피와 땀과 눈물이 소름 끼치도록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그 책을 요약하자면 좀더 길어진다. “자유시장이 어떻게 남미와 동유럽, 남아프리카와 러시아, 이라크, 아시아 등 전 세계의 끔찍한 폭력과 충격의 순간을 이용했는지를 이야기한다. ‘쇼크 독트린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들을 돌아보고, 재난 자본주의의 부상, 세계은행과 IMF의 진실과 허구, 아시아에 가해진 쇼크, 우리 곁에 다가선 재난 자본주의에 대해 살펴본다.”

재난 자본주의. 나오미 클라인은 자연 재난이든 사회적 재앙이든 가리지 않고 그것을 기회로 더 많은 이윤을, 더 많은 착취의 기회를 노리는 세력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재난은 단지 재난으로 그치지 않고, 강제적으로 사회를 더 나쁘게 개조하는 계기이자 프레임으로 작동한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쇼크 독트린>에 대한 보완이자 대안처럼 보였다. 실제로 저자인 레베카 솔닛은 <쇼크 독트린>을 쓴 나오미 클라인을 여러 번 비꼬고 비판하고 있다. 클라인이 위로부터의 정복에 패배해버린, 절망한 좌파의 한계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궁금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모임에 함께 했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는 재미있지만 조금 심심했다. 아니 심지어는 조금 시시하게 느껴지는 대목까지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좋은 생각의 씨앗들, 다른 곳에서 실탄으로 쓰기에 충분한 개념들이 제법 들어있는 책이기도 하다. 책으로서의 밀도는 조금 낮지만, 실용성은 높은 책이라고 해도 될까. 일종의 사전이고, 일종의 매뉴얼인 그런 책.

시간이 없거나 성질이 급하거나 책 구매 우선순위를 조정해야 하는 처지라면, 과감히 서곡: 폐허에서 발견한 날카로운 기쁨만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 서문은 당신은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위기의 순간에 이것은 생사를 가르는 질문이다.”라는 문장들로 시작해 사람들은 재난이 닥쳤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연대, 이타주의, 즉흥성!_인용자) 현대적 의미에서 정전이라는 재난은 불행이지만, 이 오래된 천체들의 재출현은 이와 반대다. 재난은 지옥을 관통해 도달하는 낙원이다.”로 끝난다.

분량도 적당하다. 책 전체는 주석과 색인까지 포함해 511쪽에 달하지만 서문은 15쪽에 불과하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앉거나 서서 읽기에 무리 없는, 딱 그만큼.

 

15쪽이라고 얕보지 말 일이다. 이 서문만 잘근잘근 잘 씹어 먹어도 재난재난 이후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 대응력을 한뼘 더 키워줄 만하다.

이런 대목을 함께 읽어보자. 좀 길어도, 511, 혹은/15쪽의 축약, 축약본이라고 생각하고.

 

[믿음이 중요하다(물론 많은 이들이 자신의 믿음과 달리 관대하게 행동하기도 하고 그 반대인 경우도 많지만).

카트리나는 재난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엄청난 재난이 닥쳤을 때 우리가 보이는 행동은 우리가 이웃을 재난의 참혹한 피해보다 더 큰 위협으로 여기느냐, 아니면 집과 상점에 있는 재산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느냐에 달려 있다. 믿음이 행동을 결정한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은 자신과 타인들의 생사를 결정한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재난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카트리나는 대부분의 재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타주의가 두드러졌다. 함께 고립된 타인들에게 물과 음식, 기저귀 같은 생필품을 공급하고 그들을 보호하는 데 앞장선 젊은이들, 이웃을 구조하거나 대피시킨 사람들, 무기와 연민으로 무장한 채 배를 타고서 불어난 물로 고립된 사람들을 찾으러 나간, 수백 수천의 집계되지 않은 사람들. 재난 이후 인터넷 사이트 ‘HurricaneHousing.org’를 통해 생면부지의 타인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괴소문 대신 피해자의 사진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한 20만여 사람들, 멕시코 만 연안을 재건하고 복구하기 위해 모여든 수만 명의 자원자들.

지진이나 폭격, 태풍이 닥치면 사람들은 대부분 이타심이 발동해 자기 자신과 가족,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타인과 이웃들을 보살피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재난이 닥쳐오면 인간은 이기적으로 돌변하고 공황에 빠지거나 야만적인 모습으로 퇴보한다는 관점은 그다지 사실적이지 않다. 세계대전 대폭격에서부터 홍수와 토네이도, 태풍에 이르기까지, 많은 재난 속에서 사람들의 행동을 수십 년 동안 꼼꼼히 연구한 학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입증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믿음은 학자들의 연구를 뒤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대재난을 당했을 때 주로 최악의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은, 남들이 분명 야만적으로 행동할 것이므로 자신들은 야만적 행위를 막으려는 방어적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믿는 이들이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에서 2005년 뉴올리언스 홍수에 이르기까지, 무고한 사람들이 그런 자들에게 살해되었다. 살해자들은 오히려 희생자들이 범죄자이며 자신들은 질서의 수호자라고 주장했다. 믿음이 중요하다.]

 

믿음이 중요하다. 믿음이 행동을 결정한다. 믿음이 중요하다.

 

서문만 읽어도 충분할 거라고 했지만, 더 읽으면 더 좋은 법이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는 믿음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그 믿음과 희망을 누가, 어떻게 산산조각 내는지, 우리를 갈기갈기 찢어 저만 아는 거인-개인들로 만드는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레베카 솔닛은 재난 시기에 짧게 존재하는 유토피아를 통해 거꾸로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재난과 닮아 있는지 아냐고 묻는다. 경쟁, 경쟁, 경쟁. 우리는 적의로 서로를 대하고, 이윤으로 서로를 잰다. ‘우리는 끊임없이 해체되고 만이 남는다.

일상의 재난, 그것을 위로하는(중독에 빠트리는!) 현대적 장치로 솔닛은 심리요법과 시트콤과 베스트셀러 들을 지목한다. 물론 더 많은 리스트가 있겠으나, 일단 저 세 개! 이 세 가지 장치들이 만드는 세상 안에서 인간은 순수하게 개인적 영역에 국한되어 있. 그곳은 우리가 바깥 활동을 하다가 휴식을 위해 돌아갈 수 있는 따듯한 집이 아니세계의 중심에 있는 쉼터가 아니라 세계 전체였다. 말하자면 그곳은 감옥이었다. 세상은 이보다 훨씬 더 크다.”

저만 아는 감옥에 갇힌 우리의 일상이 곧 재난이다. 그리고 그 일상을 깨트리는 재난지진, 화재, 태풍, 전쟁, 혁명이야말로, 유토피아다. 사람들은 재난 시기에 비로소 타인을 발견하고, 그 삶, 삶들과 직접연결된다. 짧지만 강렬한 유토피아.

 

세상의 수많은 재난들을 다룬 이야기들이 저도 몰래 전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생각이다. “문명화된 사회의 요소들이 산산조각 났으며, 많은 사람에게 남은 것은 오직 자기보존을 위한 정글의 법칙뿐이다.” 문명은 밑에서 으르렁거리는 야수들을 간신히 막고 있는 방어막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이야기하고, 그래서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야만성과 맞싸우는 전제국가의 필요성을 이야기한 것은 홉스였다. 레베카 솔닛은 현대 자본주의의 삶이 기본적으로 홉스주의적 정의定義 위에 구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예가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둔 리얼리티 프로그램 <서바이버>.

“<서바이버>의 규칙들은 희소성과 경쟁, 승자와 패자라는 자본주의 요소를 도입했다. 출연자들은 야생이 아니라 독단적이고 독재적인 체제에서 생활했다. 그곳은 어쩌면 로스앤젤레스거나 런던일 수도 있다. 제작자들은 위기 상황에서 날것 그대로의 인간 본성을 보여주는 듯이 가장하지만, 사실은 홉스식 행동, 또는 이곳에서 매한가지로 볼 수 있는 시장경제식 행동을 이끌어내기 위한 장치를 신중히 마련해 놓았다.”

레베카 솔닛은 홉스가 <리바이어던>을 쓰고 있던 동시대 영국에 그와 전혀 다른 비전을 갖고 다른 실천을 행한 이들을 소개한다. 영국사에서 집단주의적 유토피아를 추구했던 수평파 또는 디거스가 바로 그들이다. “한 아버지의 아들로서,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함께 일하고 함께 먹을 것, 그리고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군림하지 않고 모두가 서로를 평등하게 창조된 존재로 볼 것을 주장하고, 그 주장을 공유한 이들이다.

 

레베카 솔닛은 여러 재난들에서 찰나지만, 저 디거스와 수평파의 이상이 잠시 실현되었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희망을 찾자고도.

그녀의 재난 유토피아는 호소력이 있다. 모든 재난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우리는 솔닛의 모든 이야기에 대한 확실한 반박의 예를 하나 갖고 있다. 당장 떠오르는 관동대지진!) 재난 속에서 우리가 평소에 생각한 것과 다르게 행동한 이들이 있었다는 것. 거기에 믿음을 걸어야 한다. 책에서는 잘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심지어 관동대지진 때도 마찬가지였다. 괴소문에 휩쓸려 대학살이 자행되고 있을 때 선량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 중국인들, 오키나와인들, 심지어 일본어 발음이 부정확한 장애인들이나 부락민들을 도왔다. 피바다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존재했던, 가냘픈 유토피아!

 

재난 유토피아는 찰나적이다. 토호쿠와 칸토에서, 좀더 크게 동일본에서도 그러했다. 우리들 후쿠시마국민이라는 글에서 문학평론가 이케다 유이치는 이렇게 적고 있다.

 

[대지진 이후 일어서라 일본이라고 부흥을 외치는 () 이 공허한 호소는 지진 재해 직후 열렸던 공공성을 다시 닫아 버렸다. 지진이 발생했을 때는 공원, 주차장, 거리에서 사람들이 말을 주고받고 기꺼이 서로 돕고 격려하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과거일이 되었다. 대신 공적 기관이 내놓는 공허한 호소가 그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그리고 그 와중에 사람들 사이에 분할선이 그어지고 있다.

처음에 분할선은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로부터 10km 반경에서 그어졌다. 그것이 20km가 되고, 나아가 20km30km 사이의 지역이 위험 구역과 그렇지 않은 곳을 구분하는 분할선 자체로 재작성되어 행정과 아울러 방사능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 그 지역에서는 옥내퇴피령이 내려졌다. 그렇게 낙인효과가 더해져 금기해야 할 장소, 저승과 현세 사이의 세계라는 상징공간으로 등록되었다.

또한 후쿠시마 현과 바깥 지역을 가르는 현의 경계가 위험한 구역과 그렇지 않은 구역의 분할선으로 재작성되었다. 이 분할선은 실제로 측정된 방사능 양에 근거해 그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국가가 이미 단위로 갈라 놓은 행정적 경위에 따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할선이 행정의 단위보다 자연스러운 것, 즉 방사능의 위험으로 가득한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을 가르는 경계처럼 재작성된 것이다.]

 

유이치가 적고 있는 것들은 190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1917년 핼리팩스에서, 2001년 뉴욕과 2005년 뉴올리언스에서 이미 진행된 일들이었다. 토후쿠는, 후쿠시마는, 우리 당대의 강력한 재난이고, 여기서 유토피아는 너무 짧게 존재했다. 공공성으로 가득한 유토피아가 존재하다가 어느새 슬그머니 분할선들이, 심지어 재난 이전보다 더 강력한 형태로 만들어진다.

그러니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니, 그건 레베카 솔닛도 알고 있는 것이다. 믿음이 중요하다. 믿음이 행동을 결정한다. 그러니까 유토피아와 공공성에 대한 믿음과 기억은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행동과 질문들의 연쇄 속에 유토피아가 존재할 것이다.